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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정읍이야기

조선의 읍치경관, 정읍에도 나타난다

조선의 읍치경관, 정읍에도 나타난다
[연재] 박래철의 정읍땅이야기...1872년 정읍현 고지도 분석하여 현재 위치 비정

 

 

 

 

 

 

 

 
▲ 조선시대 유교이념이 반영된 읍치경관 모식도. 지방 군현의 치소에 적용되었던 도시계획의 틀이다.
과거 정읍현 지역을 표현한 옛지도 중에 가장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지도는 이른바 ‘1872년 지도’ (조선후기 지방지도)라고 하는 회화식 지도이다. 이 지도보다 앞서 만들어진 지도에 비해 훨씬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었으며, 실용성과 더불어 예술성 또한 떨어지지 않는다.


이 지도에서는 위쪽에 남쪽을 배치하였는데 이는 왕이 남쪽을 바라본다는 입장을 고려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또한 행정중심지인 관아를 실제보다 크게 그려놓았는데, 이것은 당시 중앙집권적 정치구조가 지도에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1872년 당시 정읍의 수도를 살펴보자

 

 

 

 ▲ 편의상 이 지도를 요즘의 지형도와 비교하기 이해 원본과 달리 방향을 뒤집어서 스캐닝하였음. 위쪽이 북쪽임

 

이제부터 1872년 정읍현 지도에 표현된 내용을 분석하여 당시 읍치 경관의 특징을 살펴보고 현재의 위치와도 연결을 시켜보자. 먼저 정읍현의 주산(主山)이라 할 수 있는 성황산(일명 응산)은 고당산으로부터 시작하여, 조산이라 할 수 있는 칠보산을 거쳐 연결되는 산줄기이다.

이 산은 풍수지리상 안산(案山) 역할을 하는 초산보다도 낮은 산이라 정읍현을 포근하게 감싸주지는 못하지만, 관아의 북쪽에 있기에 주산의 역할을 한다. 일찍이 성황사(城隍祠)가 위치하여 산 이름도 성황산이 된 것 같다.

 

 정읍의 주산 성황산엔 성황사와 여단이 있어 제사를 지냈다 

이곳은 이름처럼 서낭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기에 읍치경관 모식도로 보자면 관아의 서북쪽에 위치한 여단(厲壇)과 관련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황사는 응산(鷹山)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성황산에 위치한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여단은 현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성황사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별도로 존재하는 제단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는 성황사와 여단은 관아의 북쪽에 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정읍 향교, 원래는 성황산 충렬사 부근에 위치

향교는 지도상에서 관아와 거의 붙어서 동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위치한다. 관아의 중심지였던 정읍여중에서 향교가 인접한 정읍동초등학교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현재 정읍동초등학교 옆에 위치한 정읍향교는 읍치경관 모식도상의 동편에 위치하여 일반적 배치와 일치하지만, 조선후기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오기 전에는 성황산 충렬사 부근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지도상에는 향교의 건물이 2개가 있는데 위쪽에 학생들의 배움터인 명륜당이라는 이름이 있고, 그 아래 건물에는 이름이 없지만 공자님을 모신 대성전을 묘사한 것이리라. 한편 향교가 지금의 공립중등학교라면 서원은 사립중등학교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 둘은 학생들의 수요를 생각하여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입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정읍의 경우에도 정읍향교가 동쪽에 위치하니, 고암서원은 치소와 멀치감치 떨어진 서쪽에 설립된 것이리라. 공, 사립간 협력체제라 할 수 있겠다.

 

관아와 부속 건물들, 정읍여중- 장명동사무소- 세무서- 경찰서 영역에 위치

   

 

 

▲ 정읍현 고지도와 비교하기 위해 비슷한 영역을 스캐닝하였음.


 

 

 

 

지방관 즉 사또가 근무하고 생활하는 동헌(東軒)은 지도에서 관사(官舍)로 씌어있고, 그 왼편에는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를 모시는 객사(客舍)가 있다.  관사 아래쪽에는 관아의 부속건물인 사궐(史厥), 권상루(勸相樓), 현사(懸司) 등이 있는데, 관아와 그 부속건물은 현재 정읍여자중학교를 중심으로 장명동사무소, 정읍세무서, 정읍경찰서를 포함한 영역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관아에서 가까운 곳에 교육기관으로 보이는 육영제(育英齋), 우암 송시열이 최후를 맞이했던 유허비각(遺墟碑閣) 등이 위치한다.

 

관아 남쪽 정읍천의 북쪽 면에 장시(場市) 위치, 시기동 지명의 근거

관아의 남쪽에는 정읍천이 흐르는데, 그 북쪽면에는 장시(場市)라는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이곳이 지금의 시기동(市基洞)이라는 지명의 근거를 제공하였고, 지금의 정읍제1시장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일명 5거리 시장이라고도 부르듯이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에 시장이 들어선 것이다.

 

정읍의 남쪽엔 사단(社壇) 위치....초산과 망상봉 근처

정읍의 남쪽에는 사단(社壇)이 위치하는데, 이곳은 지방관(사또)이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지금의 초산과 망상봉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1번 국도가 지나는 ‘단고개’라는 지명의 근거가 된다고 볼 수 있겠다. 고개 정상부에 위치한 당현동이라는 마을 이름도 원래는 여기에 근거하였을 것이다. 사단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현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정확히 말하여 관아의 남서쪽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관아 보호 위해 성곽대신 정읍 농고 서편에 인공 저수지 축조 가능성

읍치경관 모식도를 보면 지방의 관아를 보호하기 위해 4대문이 표시되어 있지만 정읍현처럼 인구규모가 작은 곳은 성곽시설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관아 서쪽에는 요도제(蓼島堤)라는 호수가 보이는데 이곳이 인공저수지인지 자연호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죽모탱이라 불리는 정읍제일고등학교 서편의 소지명과 관련이 될 것으로 추정한다.

어쩌면 이곳은 정읍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가 서쪽만을 감싸주지 못한 이유로 풍수지리적인 목적으로 이곳을 보강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정읍현 치소의 서쪽이 허하여 이곳으로 빠져나가는 지기(地氣)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마치 전주 사람들이 덕진연못을 조성한 것처럼…….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반영된 일반 읍치 경관, 정읍현에도 일정 반영

지금까지 1872년 고지도를 바탕으로 정읍현의 읍치경관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의 중앙집권적 정치구조가 반영된 일반적 읍치 경관은 큰 틀로 보아 정읍현에도 일정부분 반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정읍현에도 유교적 이념이 바탕이 되는 도시계획이 투영되었던 것이다. 

정읍현 지도에서 중심지인 현내면을 중심으로 동면, 남일면, 남이면, 서일면, 서이면, 북면이 감싸주었던 읍치경관이 지금은 시내권을 중심으로 내장동권역, 교암동과 과교동권역, 입암면, 농소동권역, 북면 등으로 이름이 크게 바뀌었다.

이런 역사의 뒤안길을 걸어온 정읍의 도시경관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더 진화할 것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입력 : 2007년 03월 27일 01:48:25 / 수정 : 2007년 03월 27일 0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