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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정읍이야기

곰소만 일부가 고부 땅이었다

곰소만 일부가 고부 땅이었다

<대동여지도>로 본 정읍의 옛모습...곰소만 진출 위해 월경해서 특별 행정구역으로 확보

 

박래철 ppuri1@eduhope.net

 

 

 

 

 
▲ <정읍군사>에서 스캐닝한 자료임.
1861년에 완성된 대동여지도의 일부로서 분홍색은 고부군, 노랑색은 정읍현, 하늘색은 태인현에 해당함.


고부군이 정읍현과 태인현을 아래에 두었던 시절, 고부군의 영역은 산과 들은 물론 바다까지 포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고부군에 속한 바다는 바로 고창 부안군에 걸쳐있는 곰소만의 일부였다. 곰소만의 일부가 고부 땅이었다는 사실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옛 정읍의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 현대 지도의 정확성과 큰 차이 없다

우리나라 역사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지리학자를 들라하면 대부분 주저 없이 고산자(古山子) 김정호 선생을 얘기할 것이다. 그는 조선후기 나라가 어지러울 때 국토의 모습을 정확히 묘사한 지도(地圖)와 지지(地志)의 필요성을 느껴 일생동안 지도와 지지의 편찬을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김정호 선생이 남긴 걸작은 역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대동지지(大東地志)>이다. 특히 대동여지도는 오늘날의 우리나라 전도에 비해서도 그 정확성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 우수한 지도라고 한다. 대동여지도는 1861년(철종 12년)에 완성된 목판지도인데 이는 사람들에게 지도를 널리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고, 또한 자유롭게 떼고 붙일 수 있도록 만든 이른바 '절첩식' 지도라는 점도 실용성을 높인 대목이다.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형, 분수계와 산줄기가 중요 

<대동여지도>를 보면 산을 독립된 하나의 봉우리로 표현하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산맥)로 나타내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형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분수계(分水界)와 산줄기가 지도에 명료하게 표현된 것이다.

또한 <대동여지도>에서 도로는 직선으로 표시되었는데, 이는 <대동여지도>가 목판본이기 때문에 흑백으로 인쇄될 수밖에 없었고 곡선으로 표현되는 하천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하천과 도로를 더욱 명확히 구별하기 위해 10리마다 도로에 점을 찍었는데,  이용자에게 매우 편리한 거리 표현 방식이 아닐 수 없다.

 

150여년전의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정읍은.... 

그렇다면 약 150년 전에 완성된 우리의 위대한 문화유산 <대동여지도>에 정읍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을까?  마침 1985년에 간행된 <정읍군사(井邑郡史)>에 정읍지역을 표현한 대동여지도가 있어서 이를 스캐닝 하여 소개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동여지도>는 원래 목판인쇄본이기에 모든 게 흑백으로 표현되지만, 이 지도는 정읍시(당시 정읍군)지역만을 뚜렷하게 나타내기 위해 3가지 컬러를 사용하여 덧칠을 하였다. 그것은 오늘날의 정읍시가 고부, 태인, 정읍이라는 각기 다른 3개의 행정구역이 조각모음처럼 합해져서 이루어진 상황임을 한눈에 알아보도록 하기위한 배려이다. 지도에서 고부는 분홍색, 정읍은 노랑색, 태인은 하늘색으로 칠하였는데, 정읍시의 역사성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 <정읍군사>에서 스캐닝한 당시 정읍군의 행정구역. 현재의 정읍시와 면적이 일치한다.


1894년 갑오개혁전에는 고부군 아래 태인현과 정읍현이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전국의 군(郡)과 현(懸)으로 나뉘던 행정구역이 군(郡)으로 통일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전까지는 정읍시 영역에서 상위의 행정구역은 당시 고부군 이었다. 고부군은 태인현과 정읍현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와 물자가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전라북도 서남지역의 중심지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호남선 철도의 개설과 호남고속도로의 개통이라는 새로운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인하여 고부가 가졌던 우월한 행정중심기능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지금은 그 역할을 정읍에 완전히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대동여지도>의 특성상  도로를 직선으로 표시하였는데, 고부 태인 정읍 사이에 역삼각형으로 나타나는 '트라이앵글'의 모습이 당시 세지역간에 긴밀하게 유지되었을 인적 물적 네트워크로 상상(想像)되기도 한다.

 

600년전 고부와 태인 인구는 당시 정읍현의 두배 

이제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정읍시를 이루는 고부군, 태인현, 정읍현의 3조각을 비교하고 분석해보자. 먼저 세 지역의 면적을 비교해 보면 태인, 고부, 정읍 순으로 넓어 보인다. 여기서 태인은 고부보다 면적이 넓지만 산지를 끼고 있어서, 평야가 넓은 고부에 비해 인구부양력은 다소 떨어졌을 것이다.

참고로 조선 초의 문헌인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약 600년 전 당시 고부의 인구는 1,592명, 태인의 인구는 1,526명, 정읍의 인구는 85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농경지 면적을 보면 고부는 6,601결(結), 태인은 5,304결, 정읍은 2,658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고부와 태인이 적어도 조선시대까지 정읍에 비해 그 세력이 크게 앞서는 상황이었음을 확인하게 되는데, 지금의 상황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곰소만 일부인 고창 부안면 해안 일부, 고부군 영역으로 포함됐다 

<대동여지도>의 고부군, 태인현, 정읍현이 모아져 이루어진 행정구역의 외곽선과 오늘날의 정읍시 행정구역의 경계선을 비교하면 면적은 비슷할지 몰라도 경계선의 모양이 많이 다르다. 이는 세 지역이 갖는 행정구역이 지금과 많이 달랐다는 사실이다. 고부군의 경우, 지금의 고부면 영원면 이평면 정우면 덕천면 소성면을 포함하고, 이외에도 부안군 백산면과 주산면 일부, 그리고 고창군 부안면 일부지역까지를 포함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고부군에 곰소만의 일부인 고창군 부안면의 해안지역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인데, 지도를 보면 특별하게도 경계를 뛰어넘어 떨어져있는 이 지역을 고부군의 영역으로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고부천을 통해 바다와 연결되는 구조였지만, 계속해서 소규모의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고 토사가 쌓이기에 더 안정적인 교통로를 확보하고 해산물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태인현의 경우, 태인면 신태인읍 감곡면 옹동면 칠보면 산외면 산내면과 북면의 일부를 포함하였다. 정읍현의 경우, 지금의 정읍시내 동지역과 입암면 북면 일부를 포함하였다.

 

정읍의 옛 지명, 산, 하천, 고개 등 자연환경 관련 지명 비율 우세 

<대동여지도>의 고부군, 태인현, 정읍현에 나타나는 지명을 분석해보면 산, 하천, 고개 등 자연환경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그리고 치소, 역, 저수지 등 인문환경과 관련된 지명은 그 비율이 낮다. 또한 지도상의 지명이 지금까지 같은 이름으로 사용되는 것도 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는 지명도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대동여지도>가 완벽한 실측도가 아니고 편찬도이기에 축척상의 오류가 눈에 띄며, 지명의 위치가 어긋나 있는 경우도 간혹 발견된다.

지금까지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150년 전 정읍의 모습을 거칠게나마 살펴보았다. 특별한 점은 당시 고부군에 바다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아주 오래전 고부천 하류에는 바닷물의 출입이 가능하여 고대해양문화가 발달하기도 하였지만, 계속되는 간척으로 인해 고부천을 통한 해운이 약화되고 대신 곰소만으로의 직접적인 진출을 위해 이런 특별한 월경(越境)의 형태로 해안지역을 행정구역으로 확보한 것 같다.

 

고부군, 특별한 월경 형태로 해안지역을 행정구역으로 확보 

결과적으로 당시 고부군은 지금의 부안군처럼 분명 '산과 들과 바다'를 함께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고부군은 물산이 풍부하고 문화예술이 발달한 곳이었다. 탐관오리들에게는 수탈의 대상이 되어 동학농민혁명을 불러오기도 하였지만.......

지금까지의 정읍 역사, 바다와 점점 멀어지는 역사

앞으로 새만금이라는 대규모 간척지가 조성되면 정읍은 지리적으로 바다에서 더욱 멀어지게 된다. 어쩌면 지금까지 정읍은 바다와 멀어지는 역사를 겪으면서 살아왔다고도 말할 수 있다. 바다와 관련한 과거 정읍 사람들의 경험은 그저 촌로들의 구전으로 전해지며, 해양문화의 흔적들은 이미 농토로 변한 예전의 갯벌 속에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입력 : 2007년 02월 16일 01:00:37 / 수정 : 2007년 02월 23일 10:49

 

[더 하고픈 얘기 ]
제 의견과는 좀 다른 견해이긴 하지만 계속적으로 답글을 보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님의 애정어린 말씀과 정중한 태도에 대해서도 머리숙여 존경을 표합니다.

님의 지적처럼 고부의 쇠락에는 분명 당시 무능한 우리정부와 간교한 일제의 정략적 의도가 직간접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고, 그 결과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시에 나타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제가 부정하거나 무시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고부군의 쇠락에 대한 저의 의견은 역사적 맥락보다는 지리적 관점에서 바라본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관점이 더욱 진실에 가까운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배운 지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었겠지요.

일반적으로 동서고금을 통하여 촌락과 도시 등 취락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결국'교통'이라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일제가 철도라고 하는 근대적 교통수단을 조선반도에 도입하면서 기존 도시들간의 계층구조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일제는 철도와 관련하여, 자원을 수탈하기에 적합한 장소,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역과 근접한 장소, 그리고 철도부설과 유지에 유리한 지형조건을 가진 장소 등을 찾아 역을 정하였고 그런 역을 이어서 선로를 정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정읍지역을 지나는 호남선 철도의 경우에도, 쌀 수탈을 위한 목적과 철도건설의 편리성을 감안하여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신태인과 정읍을 통과하도록 선로를 정하고 그 중심지 두곳에 철도역을 정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선로결정에는 기존의 큰 고을이었던 태인과 고부를 피함으로써 조선인들과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일본인들의 새로운 거주지(뉴타운)를 개척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이러한 일제의 철도부설과 해방이후 호남고속도로의 개설 등으로 이어지는 육상교통의 변화는, 교통조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고부와 태인을 급격히 쇠락시켰고, 신태인과 정읍을 새로운 발전의 축으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고부군 쇠락과 관련한 저의 얘기는 여기서 이 정도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하고픈 얘기, 예로부터 고부를 영주라고도 하는데 그 뜻은 바다와 관련한 고을이라는 뜻이겠지요. 기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부땅은 곰소만의 일부지역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고부천을 따라 조수가 출입하였기에 이 고을을 바다와 관련한 '영주'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기사에서 언급해야하는데 여기에서 답글로 대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