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 주동저수지의 비밀은 정읍천 | ||||||||||||||||||||||||||||||||||||||||||||||||||||||||||||||||||||||||
유역변경식 주동저수지, 공평양수장이 있어 가능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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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선이 멀지 않았다. 대통령을 꿈꾸는 주자들은 갖가지 공약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살려고 한다. 대개는 개발과 관련한 공약들이다. 그중에서 어느 유력 주자가 발표한 이른바 '경부대운하 건설계획'에 국민들의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쏟아지고 있는 공약이 되고 있다. '경부대운하건설계획'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물류 이동에 있어 고속도로나 철도대신 새로운 운하를 건설하여 지속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여기에 대해 앞으로 경제적인 타당성과 기술적인 가능성을 면밀히 따져봐야겠지만, 백두대간을 뚫고 한강과 낙동강을 이어서 물류비용을 줄이겠다는 이 계획은 아무래도 주변 생태계에는 커다란 타격을 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개발사업이란 어차피 자연의 파괴와 훼손을 감수하고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대형사업이기에 그 부작용과 피해가 커진다는 점이다. 새만금 사업이 왜 문제가 되었던가? 조선시대 이전까지 우리 조상들도 꾸준히 간척사업을 진행했음에도 그때는 왜 문제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그 규모가 크지 않아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앞으로 개발사업은 꼭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 가급적 작은 규모로 이루어져야겠고, 그렇게 했을 때 자연생태계에 미치는 부작용도 최소한에 그칠 것이다. 그런 것이 진정한 '지속가능한 개발 사업'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과거 정읍에서 행해졌던 유의미한 개발사업 한 가지를 소개하려 한다. 소성 주천삼거리 '주동저수지'는 왜 '애당제'라 불리나?
정읍에서 고창을 가려면 소성과 고부가 나뉘는 주천삼거리에서 왼쪽길을 선택하여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나즈막한 고개를 살짝 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정읍천과 소성천을 나누는 분수계가 지나는 곳이다. 여기서부터가 소성면 구역인데 그 오른편에 규모가 큰 저수지 한 곳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주변 풍광이 좋고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 더욱 멋진 곳인데, 지도에서 확인해보면 주동저수지라고 되어 있다. 주변에 있는 소성면 주천리 주동마을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하지만 소성사람들은 이곳을 주동저수지 대신 애당제라고도 부른다. 저수지 윗쪽는 '화농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옆에는 '애당제'라고 새겨진 비석이 서있다. 그리고 비석 둘레에는 애당제에 얽힌 사연이 꼼꼼히 적혀 있었는데 대략 애당제라고 부르게 된 이유와 저수지를 만들게 된 배경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기록이 있기에 소성의 지역개발이나 농경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면 '애당제' 라 씌어진 비석에 새겨진 글을 여기에 먼저 소개한다.
애당제 기적비(艾堂堤 紀積碑)
우리 화농(和農)회원 일동은 애당제 아래서 애당제 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고 또 살아갈 농민들로서 이 수자원이 하도 고마워서, 이 저수지가 만들어진 유래와 역사를 간직하여 후세에 남기고자 이 비에 몇 글자 적어 길이 보존하고자 한다. 영주산(두승산)과 방장산 사이에 전개된 소성 분지는 노령산맥의 넉넉한 수자원을 애당리 남쪽의 산자락과 중광리 동쪽에 뻗어 있는 산등성이가 소성과 고부 일부 평야는 외면하고, 정읍 삼보들과 덕천 이평 화호 부안 김제평야를 적시며 동진강을 이루어 서해로 들어가고 있으며, 소성 고부 일부 평야는 도작문화가 형성된 이래 천수(天水)에 의존하는 곳으로 흉년이 오면 조상 누대의 한이 서린 곳이다.
소성사람들이 유역변경식 저수지를 구상했는데... 윗글은 다소 문맥이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주동저수지(애당제)의 역사를 소상히 기록하였다. 기록을 바탕으로 몇가지 사실을 짚어본다. 첫번째, 내장산과 입암산을 끼고 있어 수원이 비교적 풍부한 정읍천 유역과는 달리 소성천 유역은 상류의 집수면적이 좁아 예로부터 '둠벙'이라 부르는 작은 규모의 소류지는 곳곳에 있었지만, 그저 하늘만 보고 농사를 짓는 이른바 천수답이 대체로 많았을 것이다. 용수공급의 혜택을 받는 구역을 '몽리구역'이라 하는데 이런 지역이 넓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성사람들은 농업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이른바 '유역 변경식' 저수지를 구상하게 되었다. 마치 섬진강 수계의 옥정호 물을 동진강쪽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처럼, 입암산에서 발원하는 천원천의 물을 양수하여 지금의 소성면 중광리 원천저수지(중광저수지, 지선제)에 받아서 농업용수를 공급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천원천의 물을 원천저수지로 끌어올리는 계획은 좌절되고 다시말해 지금의 입암중학교 근처에 양수장을 설치하고, 중광저수지의 둑을 높여서 저수량을 늘리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이 결국 입암사람들의 반대로 저지되었다고 하는데 이유는 아마도 입암면 지선리 쪽의 침수면적 증가로 인한 피해 예상, 양수장 아래쪽의 수량 감소로 인한 농업피해 우려 등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공평마을에서 정읍천 물 양수하여 대구모 저수지 조성 두번째, 소성사람들의 대규모 저수지 조성에 대한 요구는 계획이 수정되어 결국 이루어지게 되는데 양수장의 위치가 하류쪽으로 이동하여 결정되었고 , 그에 따라 저수지의 위치도 크게 변경되기에 이르렀다. 즉 양수장은 정읍천과 천원천이 만나는 지금의 공평마을 근처에 자리를 잡았고, 저수지는 산너머 가까운 소성면 주천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정읍천의 양수를 전제로 만들어진 주천저수지는, 그래서 집수면적이 좁아도 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면서 대부분 무심코 지나치겠지만, 저수용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은 집수면적을 갖고 있는 저수지의 상황을 인식하게 된다면 물 확보의 비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좁은 주동저수지가 넓은 평야를 적시는 비밀은 바로 정읍천 세번째, 지금의 저수지 위치는 주천리인데 왜 끝까지 애당제라 붙여졌는가? 그것은 애당초 애당마을 사람들이 처음 주축이 되어 문제를 제기했기에 '애당제'라는 말이 붙었을 테고, 이후 '애당 프로젝트'는 저수지의 위치가 변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름으로 따라다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지명을 무시한 행정 편의주의의 결과인 것이다. 애당프로젝트로 저수지 조성 추진했기에 저수지 변경됐어도 애당제 위의 사실을 확인하면서 직접 현장을 찾아가 본다. 첫째 가본 곳은 공평양수장으로 정읍천이 흐르는 농소동 목련아파트 건너편 이심정을 지나 공평마을에 도착하기 직전에 위치한다. 정읍천을 막은 보가 있고 그 옆에 양수장 건물이 있는데, 여기에서 3개의 펌프가 약 10미터 높이의 산 중턱에서 시작되는 인공수로에 물을 퍼올리는게 된다. 물론 갈수기이며 농한기인 겨울에는 양수장도 쉬게 된다. 유역변경식이라 명명할 수 있는 이곳 공평양수장과 도수로를 내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곳도 칠보발전소 방식처럼 산에 터널을 만들어 물을 보내는 것으로 상상하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약 10 미터 의 높이를 인공적으로 극복한 물은 그때부터 위치에너지에 의해 산 허리를 돌면서 이어진다. 유역변경식 물 공급
등고선을 따라 곡선으로 이어지는 콘크리트 도수로는 산의 정상부에서는 짧은 터널로 분수계를 뛰어넘고, 소성면 주천마을 부근을 지나 약 1킬로미터의 흐름을 마치면서 드디어 주동 저수지 일명 애당제로 들어가게 된다. 중간에 코스를 줄이기 위해 설치된 직선형의 도수로(로마시대 수도교처럼)도 확인하였다. 간혹 주동저수지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정읍천의 수질이 양호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비록 농업용수이지만 기본적으로 식물에 적합한 수질유지가 필요하다고 본다.
소성평야를 적시는 일등공신은 바로 공평양수장 또한 주동저수지의 물은 또다시 서쪽의 고부 만수저수지로 이어진다고도 하니 공평양수장의 중요성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결국 소성평야를 천수답에서 물걱정 없는 수리안전답으로 바꾸어 놓은 일등공신은 그래서 공평양수장인 것이다. 그리고 소성평야를 적셔주는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저수지는 이곳 주동저수지를 포함하여 만수저수지, 원천저수지 등 3곳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성을 지금까지 30년 넘게 먹여 살려온 저수지에 공신녹권 대신 그 공로를 찬양하는 비석을 세워주기도 했지만, 진짜 숨은 공로자는 역시 공평양수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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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1월 15일 04:22:59 / 수정 : 2007년 02월 18일 08: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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