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동 정읍 구도심, 사진으로 본 100년의 간극 | ||||||||||||||||||||||||
20세기 초 ‘정읍구시가지 전경’ 사진 분석과 21세기 현재 구도심 모습과의 비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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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전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이후 수십 년 전에 이르기까지 정읍과 관련된 모습들을 사진으로 보여주었는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타임캡슐을 뜯어보는 재미라고 해야 할까?
사진, 100년전을 상상할 수 있는 종이화석 100년 전을 상상할 수 있는 ‘종이 화석’ 그것을 사진으로 남겨놓은 사람들이 해방 전에는 대부분 일본인들이라 하더라도 주체성이나 예술성과는 별개로 그 자체가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화면의 크기는 감동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했던가? 대부분 실제 사진을 확대하여 전시한 기획전은 그래서 볼만하였다. 사진을 확대하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화질의 저하는 여기서는 큰 문제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 내가 본 흑백 사진들 중 가장 큰 인상을 받은 사진은 단연 ‘정읍구시가지 전경’ 이라 씌어진 사진이었다. 처음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감동을 받기도 하였다.
일본인이 촬영한 100년전 정읍 구도심 이것은 일본인이 촬영한 100여 년 전 정읍의 시가지 풍경을 담은 사진으로 원본은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사진속의 희미한 산과 하천 그리고 가옥과 도로들을 지금의 모습과 오버 랩 시키면서 비교해보았다. 이 순간 마치 조각난 그림퍼즐을 하나씩 맞추어가는 희열이 느껴졌다. 정읍 시내에서 태어난 사람만이 가능한 게임이었다. 이 사진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건 아마도 ‘시간의 누적’이 전해주는 감동보다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장소에 대한 본능적 관심이 앞섰기 때문이었으리라. 한편 사진이 흑백이기에 컬러가 갖는 강렬함과 생생함은 다소 떨어져도, 흑백만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러움은 오히려 최대한 표현된 것 같았다.
100년전 구시가지 대부분은 초가집 사진을 처음 대할 때 두 가지를 생각하였다. 촬영 시점은 언제이며 촬영 장소는 어디쯤일까? 먼저 촬영 시점을 유추해본다. 사진속의 도로는 반듯하지도 않거니와 지금처럼 폭이 넓지도 않아 자동차가 다니기 어려운 조건이다. 아마도 사람이니 우마차의 통행에 맞추어 자연스레 형성된 도로인 건 같다. 그것이 일제강점기 1번 국도의 역할을 위해 ‘신작로’로 확대 개편되기 전까지의 모습이겠지만. 그리고 사진속의 가옥은, 띄엄띄엄 기와집도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 초가집이다. 마치 지금의 민속촌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사진 촬영 시점이 일제 강점기라면 최소한 근대화된 서양식 건물이 보여야 할 것이고 일본인들이 신도심(new town)을 형성한 곳은 지금의 수성동 쪽이니 사진의 초점도 그 쪽으로 잡았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 사진은 근대화 이전의 모습이라 추측된다.
그때도 뚜렷하게 찍힌 정읍향교의 맞배지붕 두 번째 촬영 장소를 추측해본다. 왼쪽엔 동초등학교 사거리, 오른쪽엔 성황산 밑의 향교와 동초등학교 터, 지금은 이곳을 장명동이라 부르고 있으며 과거 정읍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당시 정읍관아(지금의 정읍여중)와 정읍향교를 중심으로 조성되었을 정읍의 구 시가지.
100년전 정읍 구시가지 중심은 관아(현 정읍여중)와 향교가 있었던 장명동 정읍 시가지는 여기에서부터 점점 확장을 거듭하여 동쪽으로는 상동, 남쪽으로는 시기동, 서쪽으로는 수성동과 연지동으로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사진속에서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은 남초등학교 뒷산인 망상봉과 죽림봉이다. 정읍천은 멀리 떨어져 있어 그것이 자유곡류를 하는지 직강공사를 하여 직선으로 흐르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사진의 왼쪽부분에 살짝 드러난 조곡천의 모습, 그것은 분명 복개천이 아니었다.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아이들이 멱을 감았을 곳이었을 텐데 아쉽게도 주변 각시다리의 모습은 취락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흑백사진속의 정확한 촬영 포인트를 찾기 위해 사진을 인쇄하여 들고 올라간 곳은 몰고개 옆 장명동 상수도 배수장 근처. 비록 취락과 도로 등 인공적 환경은 몰라보게 변했지만 간선도로의 방향과 주변 산세를 맞추어 비슷하게 추측되는 지점이 이곳이다.
과거 100년전까지의 변화보다 그후 100년간의 변화 폭이 더 크다 이곳은 일명 노적봉이라고도 하는데 최근 확장공사로 인하여 산이 깎이고 경사가 급하여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얼추 비슷한 촬영 지점을 잡아 셔터를 눌렀다. 위치는 이보다 높은 곳이었겠지만 상수도 배수장이 통제되고 또한 높은 지점에 나무가 가려서 이보다 더 이상 좋은 촬영지점을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아 이 사진으로 만족해야 했다. 여기서 바라본 현재의 모습 그리고 1세기 전 과거의 모습을 비교하니 실로 엄청난 경관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1세기 이전까지의 겪었던 변화량보다 최근 100년 동안의 변화가 더욱 컸으리라 짐작된다.
1세기전 정읍 시가지는 도시보다는 촌락 1세기의 간격을 가진 두장의 사진을 놓고 사람들은 각자 여러 가지 관점으로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평가 또한 다양하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민속촌 같은 1세기 전의 흑백사진을 보고 혹자는 예스러움이나 그리움을 느낄 것이고, 어떤 이는 전근대성과 낙후성을 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는 정읍의 구시가지 모습, 그때는 ‘도시’보다는 ‘촌락’이란 단어가 더 어울릴 것 같다. 초가집이 주를 이루는 정읍의 옛 풍경은 그저 정겹게만 느껴진다. 부드러운 지붕 선을 갖는 초가집은 평화로움을 맘껏 발산한다.
곡선에서 직선으로 변한 도시의 선, 주민 심성도 그리 변화한 것일까? 비록 당시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겠지만, 인간적 덕목이 실현되는 지역공동체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직선형의 폭넓은 도로가 사방으로 퍼져있고 정육면체의 콘크리트 건축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지금의 삭막한 도시 모습과는 달리, 모든 게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곡선이 주를 이루는 정읍의 옛 풍경이 보다 인간적인 느낌을 가져다준다. 그러고 보면 1세기의 간격을 두고 곡선의 부드러움은 어느새 직선의 딱딱함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그게 어찌 풍경의 변화만 그러할까? 이 땅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심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그것이 결국 현대인들에게 나타나는 각종 병리현상으로 이어진다고 보면 지나친 억측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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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11월 29일 23:58:33 / 수정 : 2007년 02월 18일 08: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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