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회암 동굴이 정읍에도 있습니다 |
[연재]박래철의 정읍땅이야기...산외면 정량리 상용두마을의 '용굴', 석회암 동굴을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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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입구. 구멍은 2개지만 하나로 연결된다.
동굴 내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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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의 지질을 알아보기 위해 정읍시사(2005년)를 살펴보았는데, 예상보다 다양한 암석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우선 이중에서 역시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석회암라고 하는 특별한 암석이다. 석회암은 일반적으로 열대지방의 바다밑에서 산호초가 쌓여 이루어진 그 동안 지리교과서에 소개된 우리나라(남한)의 대표적인 석회암 지역으로는 강원 충북 경북을 들 수 있고, 가까운 곳으로는 시멘트 공장이
하지만 정읍에도 이렇게 석회암 지대가 분명히 분포한다는 사실을 지금껏 알지 못했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렇게 석회암은 석회동굴을 이용한 관광자원으로 가치있다 일반적으로 석회암이 각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다. 하나는 건축용 시멘트, 농업용 비료, 제철용 원료 등 광물자원으로서의 정읍에서 석회암과 동굴을 볼 수 있는 곳은 산외 정량리 용두와 칠보 시산리 그러면 이제 기록을 근거로 정읍의 석회암지역을 찾아가 보자. 글을 읽고 상상한 것과는 많이 다를 것임을 예상하면서도, 가보지 못한 것에 "석회동은 산외면 정량리 용두마을과 칠보면 시산리에 발달되어 있다. 두 곳의 석회굴을 비교하여 보면, 용두 석회동굴은 석회암에 발달되어 칠보 시산리에서 석회동굴 찾아 헤맸지만 실패 먼저 정읍에서 가까운 칠보면 시산리를 찾아가 보았다. 산이 가까워 동굴이 있을만한 시산리 송산마을, 행단마을의 주민들을 만나 산외 정량리 상용두마을, 상두산 줄기와 도원천이 만나 만든 절벽이 석회동굴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요즘 한참 한우고기로 명성을 높이고 있는 산외면 소재지 주변, 정량리 상용두 마을을 찾아갔다. 목욕리에서 내려오는 상용두마을 석회 동굴, 관광지로도 자원으로도 활용하기에는 빈약하다 마을주민의 안내로 석회동굴을 찾아 가보았다. 절벽 같은 급경사를 이루는 작은 산의 중간 쯤에 구멍이 몇 개 보였다. 현재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없는지 동굴까지 오르는 길에 잡목이 무성하다. 다행히 과거에 만들어 놓은 콘크리트 계단 덕분에 쉽게 오를 수 있었고, 어설프게 폐쇄한 철문을 열고 몸을 웅크린 채 한번 들어가 보았다. 안쪽은 낮에도 어둡기에 깊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동굴의 입구쪽에서만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고 곧바로 동굴을 나오게 되었다. 여기에 직접 와서 보니 이곳 석회암 동굴은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출입구도 너무 좁고 동굴 안의 규모도 작아 관광지로 개발하기도 참으로 어려워 보였다. 그렇다고 이곳 석회암 지대를 공업용이나 농업용 광산자원으로 활용하기에는 매장량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러한 경제적 가치가 없기에 지금껏 오랫동안 방치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그럴 것 같다. 지형도를 보니 이 곳 산의 높이는 80미터, 평지의 높이는 50미터, 그리고 동굴의 해발고도는 약 60미터 정도에 해당한다. 동굴의 존재를 예전부터 잘 알고 있는 마을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곳 석회암동굴의 존재에 대해 언제부터인지 점점 외부로 소문이 나고 외래객들이 자주 찾아 오다 보니, 한때는 외래객들을 위해 동굴 안에 전등까지 설치한 적이 있었고 계단을 만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은 수 십 미터쯤 되는 이 동굴의 가장 안쪽에 있다고 하는 물웅덩이에서 물을 떠다 약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각종 암석에서 녹아 든 이른바 미네랄(광물질)이 풍부한 물이었으니 약효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외지인들이 동굴 안쪽에 있었을 종유석을 불법으로 채취하여 가져가기도 했다는데, 마을 어르신들은 '종유석'이라고 하는 어려운 용어대신 이를 '고드름' 이라고 하는 재미있는 표현을 하였다.
조그만 고드름처럼 종유석이 발달하고 있는 상태. 원래 있었던 큰 것들은 사람들에의해 불법채취되었다고 한다.
컴컴한 동굴벽에 붙어있는 박쥐.
탐사를 함께한 김형철선생님.
동굴안쪽에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용두마을 동굴 이름은 '용굴' 지금껏 보호받지 못하는 석회암 동굴에 혹시 있었을 종유석, 석순, 석주 등은 인간들의 손길에 전부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이제 다시 그 '돌고드름'이 다시 생겨나기까지 기다리기에는 우리네 인생이 찰나적 일 뿐이다. 한번 훼손된 자연은 원형을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한데도 사람들은 용두 석회동굴을 마을사람들은 ‘용굴’ 이라 부른다. 용이 승천한 곳일까? 용굴에 용두라는 마을 이름이 잘 어울린다. 용굴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따라 이곳 용두마을의 운명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용굴과 용두는 잠잠하다. 마을 앞을 흐르는 도원천 건너 산외면 소재지인 평사리는 날마다 '고기만'(?)으로 흥청거리는데도 이곳은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앞으로 이곳이 각광받는 관광지는 아닐지라도, 자라나는 학생들을 위해 조그만 자연 학습장이라도 만들어졌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본다.
동굴 안쪽에서 밖을 바라본 모습.
오른쪽에 있는 마을이 용두마을. 산의 모습이 용을 닮았고 이 부근이 그 용의 머리쯤으로 보여서 용두라 했을까? 산 중턱에 동굴이 위치한다.
[ 2차 탐사 이야기] 용두 석회동굴에 대한 1차 탐사는 소재파악의 의미였다면, 며칠 후 이루어진 2차 탐사는 내부규모를 본격적으로 파악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2차 탐사는 지구과학을 전공한 정읍여고의 김형철선생님과 함께 하였다. 아무래도 석회동굴은 지질학적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혼자서 깜깜한 동굴을 들어가기에는 쉽게 용기가 나지 않는 소심한 탓도 있었다.
드디어 동굴에 다시 들어갔다. 출발 전 동굴밖 나무에 준비한 실을 묶었고 실을 풀어가며 동굴 길이를 측정(약 40미터)하기도 하였다. 사전에 준비한 랜턴의 불빛에 동굴내부의 모습이 드러난다. 처음에 겨우 엎드려 들어가는 출입구와는 달리 안쪽에는 제법 반듯이 서서 다닐 정도로 동굴 안쪽에는 박쥐들이 동굴 천정 여기저기 붙어서 겨울잠을 자고 있었고, 갖가지 벌레들도 온도변화가 적은 동굴의 특성상 바깥의 차가운 기온과는 달리 겨울에도 온화한 기온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또한 보기 흉한 장면도 있었는데 그건 다름아닌 인간들의 흔적이었다. 긁힘자국이 잘 나타나는 석회암의 특성을 이용하여 벽면 곳곳에 이름을 새긴 낙서가 많았고, 이곳에서도 술판을 벌였는지 오래된 술병과 과자껍질 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혹시 모를 일이다. 먼훗날 우리 후손들이 이런 것을 발견하고서 조상들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고, 이런 낙서를 훌륭한 전위예술이라고 평가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꼴불견일 뿐이다. 이런 것을 보면서 또 다른 걱정이 생긴다. 의도하지 않은 일이지만 이런 글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 분명 동굴을 찾는 외래객들은 증가할 것이고, 동굴은 또다시 아픔을 겪을지도 모른다. 과연 우리가 자연을 이용한다는 것은 항상 훼손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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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1월 14일 22:1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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