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정읍이야기

‘솟대’가 화기를 누른다

뿌리기픈 2007. 12. 10. 21:58
‘솟대’가 화기를 누른다
산외면 목욕리(沐浴里) 내목(內沐)마을을 찾아서

 

 

산외면과 산내면의 면소재지 사이를 연결하는 715번 지방도로(평사리~능교리). 그  중간쯤에 위치한 산외면 목욕리에 특별한 것이 있어 찾아가 본다.

솟대가 있어 특별한 산외 종산리 내목마을 

 

 

 

 
▲ 현재는 3개의 솟대가 서있다. 오리가 일정한 방향을 응시함으로써 화기를 누른다고 믿는다. 마치 광화문 앞 해태상이 서울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는 것처럼....
정읍 시내에서 출발, 칠보를 경유하여 산외면 소재지에서 우회전하여 가다 보면 종산리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다시 우회전하여 가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盆地)상의 목욕리가 나타난다.  마을에 진입하는 도로는 종산리에서 이어지는 평지상의 도로가 주로 사용되었지만, 최근 소리개재라는 고개 길이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옥정호를 안고 있는 산내면 쪽에서도 접근이 쉬워졌다.


 내목마을은 마을을 중심으로 남동쪽에는 성옥산(388m), 남서쪽에는 왕자산(442m), 북서쪽에는 촛대봉(365m)이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이 중 촛대봉 아래에서 시작되는 물줄기가 동진강의 발원지로 인정받고 있으며, 종산리로 이어지는 시냇물을 따라 외부와 연결되는 도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노령산맥의 산줄기가 하나의 진입로만을 허용하며 폐쇄적인 분지 지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선녀가 목욕을 하였다는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한 목욕리. 마을은 대략 해발고도 100m에서 150m 사이의 완만한 경사부분에 위치하며, 평지가 부족한 산간마을의 특성상 논보다는 밭이 많다. 시내버스의 종점이기도 한 이곳은 내목과 외목이라고 하는 2개의 마을이 인접하고 있는데, 지명으로 보아 내목마을이 외목마을보다는 먼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목마을은 남향과 배산임수형의 조건을 잘 갖추었는데 그 마을 입구에 바로 솟대가 세워져있는 것이다.

   

 

 

▲ 산비탈에 위치한 내목마을은 밭농사 위주의 산간마을이다.
마을 안쪽에는 온천개발 예정지가 있어 목욕리라는 마을이름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있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 액운 방지 위해 세우는 민간신앙 상징물 솟대

솟대란 무엇인가? 백과사전에 의하면, 삼한(三韓)시대에 신을 모시던 장소인 소도(蘇塗)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소도에 세우는 솟대[立木]가 그것이며, 소도라는 발음 자체도 솟대의 음이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솟대는 일명 ‘짐대’라고도 하며 돌탑, 선돌(입석), 장승과 더불어 민간신앙의 상징물이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바라고 또한 액운을 막아 달라는 마을 사람들의 기원을 담은 솟대는 용틀임을 한 나무위에 새 모양으로 깍은 나무를 얹어 완성하는데 그 옆에 볍씨를 담은 주머니를 매달아 놓는다.

장대 끝의 새는 하늘과 땅의 세계, 즉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이른바 신간(神竿)의 역할을 하며, 볍씨 주머니는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매달아 놓는다. 대개 한 해 농사가 시작되기 전인 음력 1월이나 2월경에 마을제사와 더불어 해마다 만드는 곳도 있고, 윤달이 들어있는 4년에 한번씩 하는 마을도 있다.

 내목마을은 해마다 음력 2월 1일 당산제때 솟대 세운다

내목 마을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마을 입구에 세워져있는 솟대는 해마다 음력 2월 1일 당산제와 더불어 세운다고 한다. 현재 3개가 세워져 있으며, 용틀임을 하는 멋진 모습으로 옆에 서있는 직선상의 전봇대와 비교가 된다.

솟대를 이루는 나무가 오래되면 저절로 썩어 쓰러지는데 그래도 보통 7~8개씩 서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장대 끝에는 오리모양의 새가 앉아있으며 옆에 돈주머니가 달려있다. 물을 상징하는 오리는 서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곳은 지금의 칠보 발전소 쪽으로 화경산(火鏡山)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내목마을, 화경산의 화기로 마을에 자주 불이 났다고 

 

 

 
▲ 내목마을 서남쪽에 위치한 왕자산
풍수지리적인 해석과 대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 마을에서는 자주 집에 불이 났다고 한다. 하기야 나무연료를 사용하는 과거에는 이런 이유가 아니래도 불은 자주 일어났을 것이고 특히 이 마을은 산간마을의 특성상 화전식 농업을 하였기에 주변 산에도 화재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화재라고 하는 재앙에 대한 집단적 두려움을 이런 민간 신앙의 방법을 통해서라도 달랠 수가 있다면 마을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정신적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오리모양 옆에 달려있는 돈주머니는 원래 농경문화의 상징인 볍씨가 오늘날 돈으로 대체된 것인데 농경시대에서 자본주의로 변해버린 현재 상황의 반영으로 보면 될 것이다.

내목마을 솟대도 시대 따라 변화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화란 정형화되거나 화석화 될 수 없는 것처럼 내목마을의 솟대도 시대 변화에 따라 그 모습과 의미를 조금씩 달리 해왔을 것이다. 내목마을 솟대의 특징은 다른 마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선돌이나 장승의 부가적 설치가 없다는 점이며, 산지로 둘러싸인 산간마을의 특성이 잘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외부로부터 새로운 문화가 도입되기 어려운 폐쇄적인 공간이었기에 유지할 수 있었던 내목마을의 전통문화 솟대. 외부로 통하는 도로가 편리해지고 멈추었던 온천개발의 붐이 다시 일어난다면, 정읍에서 유일하게 유지하고 있는 내목마을의 솟대는 과연 어떻게 될까?

어차피 노령화되는 농촌이기에 솟대를 세울 다음 세대가 끊긴다면 내목마을의 솟대도 계속해서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다만 고대신앙의 화석이며 마을 공동체의 버팀목인 솟대가 도시민들의 여가활용을 위한 체험학습 재료로 변신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시대변화를 따를 수밖에 없는 문화의 특성상,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라도 살리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입력 : 2006년 08월 27일 03:09:29 / 수정 : 2007년 02월 18일 08: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