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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정읍이야기

짧은 답사, 긴 여운

짧은 답사, 긴 여운
영원면 은선리 고분군(백제시대 돌방무덤)을 둘러보고

 

박래철 ppuri3@ktu.or.kr

 

 

 

영원면 은선리 탑립마을 앞에서 바라본 자라고개...자라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 넘어가면 덕천면 도계리인데 도로가 나있는 곳이 큰 자라고개, 왼쪽에 자라 모가지에 해당하는 곳이 과거 동학농민군이 넘어갔으며 서낭당이 있는 작은 자라고개라고 한다. 이곳은 오솔길 같은 좁은 소로지만 옛날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정월대보름날 영원면에서는 사라져가는 세시풍속을 살리고 면민들의 단합을 위하여 정월대보름 잔치를 열었다. 식전행사로 향토사학자 곽상주선생님과 함께하는 지역문화 답사가 있었다.

사전 홍보가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지역문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부족의 현상을 반영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답사 신청자가 없었고 급기야는 답사안내자 1인과 답사 참여자 1인의 호사스런(?) 답사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 약 2시간 소요의 짧은 답사였지만 비싼 과외를 받는 호기심어린 초등학생의 심정으로 안내자를 열심히 따라 다녔다.

 

 

 

 
▲ 영원을 대표하는 문화재, 백제양식의 고려시대 석탑 뒤로 채석장이 있다. 이곳의 채석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석질의 우수성을 증명하겠지만 천태산을 볼썽사납게 만들어 놓은 꼴불견이다.
곽선생님은 천태산을 필명으로 사용하듯이 영원지역의 문화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그 동안 영원지역의 역사문화에 천착(穿鑿)해왔고 최근 영원면지를 발간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천태산 자락에 흩어져 있는 백제 고분(은선리 돌방무덤)의 위치를 손박닥 보듯이 파악하고 있음에 감탄하였고, 패배한 나라, 백제의 운명처럼 훼손되고 방치된 돌방무덤의 석재들을 보면서 함께 안타까움과 분노를 토로하였다.


백제의 지방 중심지 중방성의 화려했던 영화(榮華)가 1,500여년 역사의 흐름 속에 이제는 정읍에서도 변방이 되어버렸다. 영원의 역사문화가 경주나 부여처럼 주목받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 역사성에 대한 정당한 자리매김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은 정읍시의 중장기 계획에 의하면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이곳 영원을 중심으로 ‘마백문화 역사문화 클러스터’라는 사업을 배치해 놓고 있어 기대가 된다.

 

 

 

 
▲ 천태산 자락 어느 집안 묘역에 널부러져 있는 돌방무덤 석재,고대문화를 무너뜨리고 만든 현재의 무덤이 과연 얼마나 오래 버틸까마는 무관심한 문화행정의 현주소를 보는 듯 하다.
 

 

 

 
▲ 누군가에 의해 무너진 돌방무덤의 형체, 하루빨리 복원되어야겠다.
 

 

 

 
▲ 은선리 토성...가운데 부분이 북문에 해당되고 양옆으로 토성이 이어진다. 흙을 깍아 막든 이른바 삭토식 토성이라 한다. 토성이 석성보다 훨씬 견고하다고 한다.
답사는 자라고개(덕천면 도계리와 영원면 은선리 사이)에서 시작하여 천태산 남사면에 펼쳐져 있는 백제시대 돌방무덤을 둘러보았다. 산길에 잡목이 우거져 답사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나마 이파리가 떨어진 겨울이라 겉으로 드러난 돌방무덤 들이 비교적 잘 보였는데 그 중에는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갖춘 것도 있었고 도굴꾼에 의해 부분적으로 들추어진 것, 파괴된 것들이 많았다.


천태산과 앞쪽의 금사동산성 일대에 펼쳐져 있는 고분군은 당시 이 지역의 사회 경제적 위상을 짐작하기에 충분하였다. 아직 흙속에 묻혀 있어 발견되지 못한 고분과 이미 파괴되어 사라져버린 고분까지 감안하면 대규모의 공동묘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마치 고창 매산리의 고인돌군과 비슷한 지형적 특색과 규모를 느끼게 한다. 어차피 청동기 시대의 거석문화가 백제의 석재 가공 기술로 이어졌을 것이다. 천태산의 고품질 화강암이 돌방무덤의 충분한 재료가 되어 이후 백제양식의 고려시대 은선리 석탑이 우뚝 서게 되었고 뒤편에 볼썽사나운 지금의 채석장도 그래서 들어서게 되었을 것이다.

백제시대 고사부리성(‘우두머리 고을’이라는 뜻으로 ‘고부’ 지명의 근원이 됨)의 대강의 구조는 평시성인 낮은 구릉위에 만들어진 은선리 토성과 전시를 대비한 금사동 산성이 결합한 이른바 고구려식 형태이다. 가까운 고부천(과거 눌제천)까지 바닷물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찍이 해양을 통한 문화의 교류가 유리하고 주변의 드넓은 농경지는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전시를 대비하여 방어가 유리한 산성을 구축한 것은 이곳이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한편, 자라고개의 모가지 부분에 해당하며 100여년전 동학농민군이 황토현 승리 직전 넘어갔던 그 고개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전시를 대비해 돌을 하나씩 던져 모아놓았던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곳에서 곽선생님은 새로운 주장을 펼친다. 멀리 동쪽의 치재(현 배영중고 옆)를 가리키며 바로 저곳이 백제가요 정읍사에 등장하는 여인이 장사나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며 바라보았을 그런 곳이라고 주장한다. 샘바다 처자가 야요현(현 정읍사공원)에서 바라본 곳은 어쩌면 몰고개 너머 전주쪽이 아니라, 치재와 자라고개 너머 고사부리성 안의 저자거리였을 것이라는 개연성이다. 정읍사에 등장하는 ‘져재’가 바로 전주가 아니라 치재를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당시 지방의 행정중심지이며 시장(市場)이 크게 형성되었던 고사부리성(현 영원면 은선리 일대)을 감안했을 때 충분히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앞으로 학계에서 더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긴 하지만, 현장에서 듣는 실증적인 주장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 은선리 토성 주변에서 발견된 토기와 도자기 파편...이곳의 역사를 추정하고 모자이크 할 수 있는 자료다
 

 

 

 
1,500년의 세월을 뚫고 드러난 돌방무덤의 위용...흙으로 덮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을 망자들이 이제는 어떤 심정으로 저 돌방무덤에서 살아갈지... 겉으로 드러난 돌방무덤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는 형태
은선리 토성(土城)은 안내자의 설명이 없었다면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흔한 야산의 언덕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가 다시 한번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발에 밟히는 수많은 토기나 도기 조각이 당시 이곳이 백제 시대 관아 터임을 증명하였다. 20여 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위에서 주변을 바라보니 방어와 교통이 유리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진다. 역로와 고부천을 끼고 있어 육상교통과 해상교통이 편리하고 가까이에는 금사동산성과 수성이 있어 방어에 유리하고 멀리는 울금산성까지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것이다.


짧은 답사였지만 곽선생님의 열렬한 지역사랑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고, 영원지역의 우수한 고대문화를 실감할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다. 파헤쳐진 은선리 고분군(지방기념물 57호)들이 복원되고 조명되기를 다시한번 촉구하고 기원한다. 

 

입력 : 2006년 02월 15일 17:44:52 / 수정 : 2007년 0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