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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정읍이야기

북면은 왜 정읍시의 중앙에 위치할까?

북면은 왜 정읍시의 중앙에 위치할까?

생활권의 확대로 변화된 정읍의 행정구역

 

박래철 ppuri3@ktu.or.kr

 

해방이후 붙여진 상호(商號) 중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이 ‘중앙’과 ‘제일’이라는 명칭이라고 한다. 정읍의 경우 중앙극장, 중앙유치원, 제일서점, 제일고등학교 등이 그 예일 것이다.

이는 아마도 한국인의 국민성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즉 오랜 중앙집권적 정치구조에서 ‘중앙(中央)’을 선호하는 심성이 생겨났으며,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제일(第一)’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여기에 부가적으로 중앙부에서 멀어지는 주변부에 대해서는 동, 서, 남, 북, 이라고 하는 방향성을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학교 이름에 동, 서, 남, 북, 중앙, 제일 등의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한편에선 이를 두고 일제의 잔재라고 주장하며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초등학교’로 바꾸듯이 교명을 이번 기회에 아름다운 한글 이름으로 바꾸자는 주장도 확산되는 추세이다.

 

동-서-남-북 등 방향지시형 이름은 일제의 잔재 아닌 전통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근대적인 학교가 대부분 일제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가 반영되어 명명되었을 뿐 일제의 강요나 잔재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를 반박할 수 있는 증거로는 조선시대 행정구역을 들 수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행정구역 중 군(郡)과 현(縣)은 수직적 개념이 아니고 인구규모에 따라 차이를 두어 지정한 병렬적 관계이며 그 아래에 공통적으로 면(面)을 두었다. 그리고 1894년 갑오개혁 때 ‘현’과 ‘군’을 모두 ‘군’으로 부르도록 하였으며, 1914년 일제시대에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명과 행정구역은 또 한번 가장 큰 변화를 겪어야만 했었다. 

1872년 제작된 정읍현 지도를 보면 현(縣)아래의 면(面)을 가리키는 말 중에 내(內), 동, 서, 남, 북 등 방향성을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겠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분석해보자. 당시 현내면은 지금의 시가지 지역, 동면은 과거 내장면 지역, 남일면은 지금의 신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남이면은 그 아래지역, 서일면은 지금의 입암면 중심지역, 서이면은 지금의 농소동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그리고 당시 북면은 지금도 북면이라 하였던 것이다.

변화된 지명 중 지금의 입암면의 경우, 대체로 서일면과 남이면 지역이 합해졌는데 입암산의 이름을 따서 입암면이라 이름 붙였다. 마찬가지로 정읍현의 동면도 내장산의 이름을 빌려와서 내장면이라 불렀던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정읍현은 지금의 정읍시를 놓고 볼 때 정읍시의 남동부 지역에 해당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여러 개의 면 이름 중에서 북면만 옛 이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이는 아마도 지역 내에 특별히 지명을 대체시킬 수 있는, 이른바 랜드 마크(상징요소)가 없어서 지금껏 화석처럼 오랫동안 사용되었을 것이다.

 

 

 

[사진] 정읍시가지에서 보면 북쪽 관문에  해당하는, 북면 소재지에 위치한 면사무소

요즘 유행하는 등산용품 중 North face라는 게 있는데 이것을 의역하면 북면이라 해석되니 요즘 정읍의 북면이 뜨는 느낌이다.

 

 

 

  

 

 

 


  

북면, 북쪽인가 중앙인가

여기서 북면의 위치를 정읍시 지도에서   확인해보자. 정읍의 중심부에서 보면 이름 그대로  북쪽에 위치하여 북면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정읍시를 전체적으로 보면 분명 북면은 중앙부에 해당이 된다.

 

이런 정도의 지도 읽는 감각을 갖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왜 북면은 정읍시의 북쪽 끄트머리(지금의 감곡면 정도의 위치)에 있지 아니하고 중앙부에 위치하면서 북면이라고 했을까하는 의문을 가질 법도 하다는 얘기이다. 물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전주-정읍 간 국도를 통과하지만 과연 몇 명이나 이런 의문을 가질지는 모르겠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이런 지적인 호기심이 끼어들 틈이 없을 테고 아마도 필자의 무리한 요구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배경에는 교통시설의 발달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즉 옛날에는 걷는다는 것이 일상사였고 그로인해 두발로 체득한 지리적 감각이나 공간개념이 현대인들보다 훨씬 발달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얘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린다. 결국 지금의 북면이 현재 정읍시의 중앙부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다른 행정구역이 정읍현과 통합되면서 나타나게 된 사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행정구역의 크기가 대체로 과거에서 현재로 오면서 점점 커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교통시설의 발달로 인한 생활권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예컨대 정읍시의 경우 원래 고부, 태인, 정읍 등으로 나뉘었던 3개의 행정구역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통폐합되었던 것이다. 이는 일제시대 들어 새로이 등장한 신작로와 호남선 철도의 개설에 힘입어 주민들의 생활권이 확대되어 나타난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일제가 행정편의주의를 내세워 지명을 왜곡하여 변경하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토속지명이 사라지거나 타격을 받은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안타까운 역사이기도 하다.

 

북면이 중앙이 된 까닭은 일제하 행정구역 통폐합 때문

한편 이 무렵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확실하게 과거 정읍현의 중심지가 정읍시의 실질적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고부와 태인은 그 역할을 정읍과 신태인에게 내줄 정도로 쇠퇴하게 되었다. 혹자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죄목으로 고부군을 혁파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철도와 도로 같은 교통조건으로 인구변동이 이루어지고 도시의 흥망성쇠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개관적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부나 태인은 새로운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교통시설인 철도를 유치하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중심지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정치적인 내막이 작용하였다기보다는, 철도를 개설하는데 있어 평지라고 하는 지형적 조건을 갖춘 정읍과 신태인이 구릉성 산지를 갖고 있는 고부와 태인 보다는 훨씬 유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정읍지역의 인구를 조사해보자. 당시 고부군의 인구는 1592명, 태인현의 인구는 1526명, 정읍현의 인구는 858명의 순으로 나타나는데 오늘날과 비교해보면 매우 적은 인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금의 정읍의 인구상황과는 아주 다르게 고부지역과 태인 지역이 정읍지역보다 두 배 정도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지역의 흥망성쇠는 교통조건이 결정?

지역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이런 변화의 원인에는 일차적으로는 교통조건이 크게 작용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앞으로 지금의 정읍은 또 어떤 조건이 작용하여 어떻게 변화할 지 참으로 궁금해진다.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미래로 달려가 볼거나.

 

입력 : 2005년 10월 31일 00:46:51 / 수정 : 2007년 02월 18일 08:3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