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누리(국내답사)

판문점(JSA)를 다녀와서(2001년 여름)

뿌리기픈 2007. 12. 9. 19:31

 

 판문점 일대, 공동경비구역(JSA)의 약도

 

 오늘은 8월 13일, 광복절을 이틀 앞두고 전북 청소년연맹에서 지도교사 및 자모회장단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판문점 견학에 참여하게 되었다. 참고로 판문점(板門店)이란 행정구역상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에 해당하며 임진강의 지류인 사천(砂川)위에 놓인 조그만 다리를 중심으로 널문리 또는 판문점이라 불렀는데 한국전쟁의 휴전협약 이후 세계적인 관심지역이 된 것이다. 또한 이곳은 바로 영화 ‘JSA(공동경비구역: Joint Security Area)의 소재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구상 분단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 한민족, 돌이켜보면 그 남북분단의 외부적 요인을 과거에 일제(일본 제국주의)가 제공하지 않았던가? 마침 관광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뉴스에선 일본의 고이즈미 수상이 주변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의 전쟁범죄자들의 위패(영혼)를 모셔놓은 야스쿠니 신사(천황가문과 일본을 위해 몸 바친 군인들의 영혼을 모셔놓은 곳)를 참배한다고 했다. 2차대전의 피해 당사자국인 우리나라와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강행했다고 하는데 그 배경에는 일본의 국가주의(내셔널리즘)가 극단으로 흘러가는 일본사회의 요즘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여 진다. 그들이 과거 전쟁에 대한 참회는 고사하고 당당하게(?) 역사교과서 왜곡까지 서슴지 않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여기에는 2가지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고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첫째는 전후 독일과는 정반대로 전쟁책임자와 부역자들에 대한 단호한 심판과 사회적 격리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남한) 역사에서도 똑같이 반복된 현상이지만......(해방 후에도 사회지도층에 여전히 친일파들이 득세했다는 사실)

 그래서 일본은 사회곳곳에서 국가주의(천황 중심주의 내지는 군국 팽창주의)를 부르짖는 자들(극우세력)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일본문화의 한 가지 특성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바로 일본인들의 심성 속에 체득된 체면문화(Shame of culture, 유교문화권에 있는 공통된 사실이지만 일본인들이 유독 더 강함)로 인해 일본인들은 과거 역사적 잘못까지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 아침 개인적으로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아침 7시 드디어 전주를 출발하였다. 모두 합하여 38명, 대부분 지도교사보다는 청맹단원들의 어머님들이었다. 서로 인사소개도 없이 막 바로 출발하게 되었고 이런 서먹한 분위기는 끝날 때까지도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 밖에는 상당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청맹 관계자로부터 오늘 일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고, 이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요즘 한참 뜨는 영화 ‘친구’를 보면서 판문점을 향했다. 관광버스는 서울 외곽순환도로, 자유로(서울에서 판문점까지)로 이어졌다. 이곳 자유로는 특별히 가운데 중앙 분리지역이 매우 넓어 보였다. 현재는 왕복 4차선 정도지만 중앙부분까지 포장한다면 8차선 이상이 될 것 같아 보였다. 아마도 통일 이후를 대비한 계획인 것 같았다. 우리는 철책 선으로 둘러친 한강하류를 옆으로 보면서 임진강과의 합류지점인 오두산 전망대를 통과하고, 이어 ‘자유의 다리’가 있는 임진각이란 곳도 통과하였다. 이곳은 임진강의 하류,  강 건너편이 북한 쪽이라고 하는데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보였고 실제로 군사분계선이 지나는 곳 중 가장 강폭이 좁은 곳은 400여 미터밖에 되지 않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자유의 다리’ 부분부터 경의선 철도가 복원되고 있었고 (올 가을 완공 예정임), 조금 지나 통일대교를 통과하였는데 여기서부터는 분단으로 인해 끊어진 1번국도(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정읍도 통과함)의 복원공사가 한참이었다.  이런 공사현장을 보노라니 마치 끊어진 ‘한반도의 동맥’이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하루빨리 완공되어 남북 간에 자유로이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드디어 우리는 12시경, 남방한계선 못 미쳐 설치된 ‘유엔사령부경비대대’(일명 보니파스캠프, JSA의 남측부분을 관리하는 부대, 약 500여명의 한국군과 미군으로 구성됨, 여기서 보니파스란 1976년 이른바 미루나무 도끼사건으로 인해 희생된 미군장교 이름)에 도착하여 미리 신원조회는 했지만 간단한 수속을 밟았고, 이어 ‘판문점 식당’에서 맛있는 쌀밥에 나물반찬으로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곳도 역시 임진강 하류지역이라 미질이 우수한지 쌀밥의 맛이 뛰어났다) 잠시 후 우리는 본격적인 견학을 위해 이곳 JSA지역에서만 운영하는 버스로 갈아탔다. 흑인병사가 운전하고 한국군 병사가 안내하였는데 승차 전 관광객의 복장에 대한 규칙이 엄격하여 일일이 검사를 하였고 다행히 우린 한사람의 탈락자도 없이 모두 옮겨 탈수가 있었다. 아마도 이렇게 정장(티셔츠나 청바지 같은 캐주얼 복장을 할 수 없고  슬리퍼나 샌들 같은 신발을  신을 수 없다고 한다)을 강요하는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북한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복장의 품위를 지킨다는 이유와 또 한 가지는 혹시나 자유로운 복장이면 쉽게 월북(북쪽으로 탈출함)할까봐서 그런다고 한다. 어쨌든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런 규정을 모두 따라야만 입장할 수가 있다고 한다.

 

 영화에서만 보았던 JSA지역을 들어간다고 하니 더욱 가슴이 벅찼다. 가는 길에 경비가 삼엄한 남방한계선 철책을 통과하고, 군사분계선이 있는 판문점까지 가는 약 2Km 사이에 우리 남한에서는 가장 북쪽가까이 거주한다는 ‘대성동 마을’( 여러 가지 주거에 제한사항은 있지만 세금이 없는 등 국가적 혜택도 크고 일인당 농사경작면적이 넓어 농가소득이 높다고 한다)을 볼 수가 있었다. 이곳 대성동 마을은 지뢰에 대한 걱정도 있으련만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을 모습에서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맞은 편 군사분계선 너머엔 북한에서 조성해 놓은 ‘기정동 마을’이 다소 웅장한 모습으로 보였다. 실제로 주민이 거주하기보다는 선전용으로 조성해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양쪽마을에는 각각 선전용 국기 게양대가 있는데 남쪽의 것은 높이가 100m, 북쪽의 것은 160m라고 한다. 2개의 국기 게양대를 동시에 바라보노라니 민족의 화합보다는 대결의 인상이 짙어 보여 좋은 풍경은 아닌 것 같았다. 아직도 우리 한반도에는 화합과 평화보다는 팽팽한 이데올로기의 긴장상태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실감난다.

 

  우리는 JSA부대원들의 철저한 경비 속에 드디어 판문점 지역에 도착하였다. 비가 하루종일 내리는 바람에 다소 불편도 있었고 북쪽 경관을 바라보는데 어려움도 있었지만 남북분단의 현실을 체험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안내병사로부터 판문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많은 것들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는 점 또한 가슴 뿌듯하였다.            

               

 특히 1976년 미루나무 도끼 만행사건 이후 판문점 JSA지역에 대한 경비 방식이 공동경비가 아닌 각자 남북지역으로 나뉘어 이루어졌다는 점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 'JSA‘의 이야기처럼 ’돌아오지 않는 다리‘(군사분계선 통과)를 중심으로 양측의 초소에서 남북한의 병사들이 직접 대면하는 일은 1976년 이후 이제 더 이상 없고 지금은 남측초소에 무인카메라가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경비병간의 공식적인 대면이 이루어지는 곳은 남북회담 사무실이 설치된 지역(남측은 하늘색 건물관리, 북측은 은색건물 관리)에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는 판문각(북측 건물)이 보이는 팔각정(남측 ‘자유의 집’ 근처)에 올라가 기념촬영(사진촬영도 정해진 곳에서만 가능함)도 했고 공동 사무실에 들어가서는 군사분계선이 지나가는 협상 테이블도 보았다. 여기서 경비병들이 멋있는 포즈도 취해 주었는데 난 일부러 군사분계선 너머 북측 지역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비록 몇 미터 정도의 거리지만 분계선을 넘어보았다는 스릴을 느껴본 것이다. 사무실 주변에 있는 남측 경비병들은 꽂꽂한 자세로 북쪽을 바라보며 근무를 하고 있었고 모두가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검정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아마도 남북 경비병들 사이에선 무표정, 무반응을 원칙으로 하는 것 같았다. 한편 북측 경비병들의 모습은 눈에 잘 띄지 않아 아쉬움도 있었다.

 잠시 후 차량을 이용하여 부근 3초소의 비교적 높은 언덕 위에 올라가 북한 쪽 지역을 바라보았다. 바로 앞에는 4초소가 있고 거기에서 도끼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미루나무가 제거된 자리에 기념비만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영화에서 나오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비교적 좁은 임진강 지류인 사천 위에 조성된 다리로서 한국전쟁 직후 포로교환이 이루어진 곳)가 있었고, 비무장지대(DMZ)내 숲지대가 정말 장관이었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지역이기에 자연 생태계가 잘 보전되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너머엔 북한 쪽 논농사지대와, 비가 오는 탓에 선명하게 보이진 않지만 개성의 송악산까지 한눈에 볼 수가 있었다. 정말 통일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오후 1시30분부터 3시반까지 약 2시간 가량의 역사적인(?) JSA(판문점 지역)견학을 마치고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임진각과 오두산 전망대를 들렀고, 저녁 늦게 전주에 도착하였다.   

[2001. 8. 13  박래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