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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정읍이야기

장성갈재 옛길 답사 (전북도민일보 기사 스크랩)

전북도민일보 기획기사 '로드 다큐'

장성갈재(노령) 옛길 : 정읍 입암면 군령마을­ - 장성 북이면 목란마을

 

눈길에 속살 그러낸 `갈재의 순정'

 

기사등록 : 2010-01-21 오후 2:58:22


 

 

갈재 옛길 취재에 동행했던 사람들이 산 정상부에 위치한 고개마루를 넘고 있다.

 

 

  옛날 봇짐을 메고, 소를 몰고, 유배로 넘나든 갈재, 그 옛길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인적이 끊겨 사라졌을까, 아니면 아직도 살아 있을까. 정읍 대흥면 군령마을에서 장성 북일면 목란마을로 넘어가는 3킬로 고갯길. 갈대가 많다 해서 붙은 이름-갈재. 일제 강점기에 지명이 한자식으로 변경돼 노령(蘆嶺)이라 부른다. 276m 높이에 비해 험한 갈재는 입암산을 거쳐 방장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갈재 옛길 찾아 걷기는 눈 내린 지난 15, 16일 이틀동안 이뤄졌다. 정창환 정읍문화원장, 김성실 화가, 박래철 중읍중학교 교사도 동행했다.

언덕 펀펀하고 먼 나무가 그럴듯한데/ 희미하게 인가에 접해 있구나.

땅 기름져 밭에서는 차조를 거두고/ 산이 낮아 차(茶)를 공물 한다오.

갈재에는 구름이 암담한데/ 능악 묏부리가 뾰족하구나.

강호의 경치를 수습하고서/ 올라가니 해가 반쯤 기울었더라.’

조선시대 전기 매월당 김시습이 옛 천원역을 지나다 누각에 올라 시 한편 남겼다. 지금 정읍 입암 천원 서부마을에 옛 천원역참 자리가 있다. 매월당이 노래한 차(茶)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수출차, 정읍 천원차(川原茶)다. 광복 직전인 1923~1945년 사이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 일대에서 생산되었던 천원차(川原茶)가 해방되기 직전까지 일본 오사카에 전량 수출됐다. 천원차는 일본인 오가와(小川)씨가 1913년부터 개간을 시작한 뒤 1923년부터 생산을 시작했다. 무척 인기가 많았던 차다. 천원차의 제다법은 오룡차의 제조법과 유사하다. 찻잎을 따서 유념한 다음 10시간 정도 온돌방에서 발효시킨 후 다시 볶은 후 말려 차약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했다. 오늘날 연구 결과 천원차는, 지금 우리가 손쉽게 구해 80도의 물로 우려내 마시는 녹차와는 다르다. 지금의 녹차는 그 당시는 구하기 힘든 고급차였고 100도의 물에 우려먹는 녹차를 '오차'라 불렀다고 현지 주민들은 말들 한다.

‘오월이라 단오날에 / 냇가에 가면 /겨울 잠깐 물소리가 / 봄 소식에 웃음소리 /붉게 타던 작설나무 / 새싹 잎이 완연하다

성님성님 사촌성님 / 배양냇가 물을 길러 /진나락독 물 채우고 / 지천골로 가기 전에 /차약이나 한사발 하세
일본놈은 오차 먹고 / 조선놈은 술 마시고 /양반댁은 물 마시고 / 농사꾼은 일 좀 하고 /우리 아가 엄마젖 먹으니 / 에헤야 에헤야 상사디이여’

 

천원차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차민요’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는 1967년 진주산업대 김기원교수 채록한 것이다. 아직도 천원 인근 사람들은 천원차의 명성을 잊지 않고 있다. 그 차가 우리나라 제다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최근 천원차의 차통 포장지가 발견되었고 1928년~1929년 사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천원차밭의 전경 엽서가 공개되는 등 천원차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정읍시에서도 녹차단지를 조성하여 차 산업을 일으켜 세울 계획을 세워놓았다.

군령마을 옛 주막과 당산나무

군령마을. 옛 천원역참에서 3킬로 거리다. 눈을 뒤집어 쓴 군령은 한가로웠다. 마을 앞에 내장산, 입암산,시루봉, 방장산이 나열해 있다. 한 폭의 겨울병풍이다.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안은 지세다.군령이란 이름처럼, 옛날 이곳에는 갈재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켰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장성현편 ‘산천조’에 “위령(葦嶺)이라고 하는데, 현 북쪽 30리에 있으니 요해(要害)의 땅이다”라고 나와 있다. 또 “정읍현의 노령이 사나워 도적이 떼를 지어 있으면서 백주에도 살육과 약탈을 하여 길이 통하지 않았는데 중종 15년에 보(堡)를 설치하여 방수하다가 뒤에 폐지했다”라는 기록돼 있다.

“눈이 수북한데 어찌 갈재에 가려고 하느냐. 아마 길이 막혔을 텐데…”김윤철(60)군령마을 이장의 걱정스런 표정이다. 군령마을 초입, 수백년 묵은 당산나무가 먼저 반긴다. “나무 건너편에 옛 주막이 몇 채 있었다. 갈재를 넘어온 사람,넘어갈 사람들이 모여 목도 추기도, 요기도 했던 곳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정읍과 장성사람들의 사랑방이었다.” 김 이장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좁은 농로를 따라 1킬로쯤 가니 옛 철도길로 연결됐다. 침목과 철로는 뜯어내 갓 만든 신작로처럼 보였다. 지금은 가스관이 매설됐다는 안내문이 서있다. 기찻길이 가스길로 바뀐 것이다. 길의 또 다른 진화다.



갈재밑으로 8개 도로 ‘길 전시장’

쌩∼쌩∼. 호남터널을 지나는 차량들이 부산하다. 속도와의 다툼, 시간과의 전투 현장이다. 속도의 차이는 문화의 차이를, 사유 방식의 차이를 낳는다.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없는 존재들. 직선인 시간은 미래로만 흐른다. 되돌아 갈 수 없다. 시간의 비가역성-거꾸로 흐르지 않는 비정함, 곧 역사의 비정함과 동행한다. 길이 바뀌면 삶이 바뀌는 법. 길은 큰 버드나무를 곁에 두고 계속 뻗어 있다. 오른쪽 고속도로 밑으로 난 굴다리를 통과해야 한다. 입구 천장에 시든 해바라기꽃 같은 벌집이 통행증을 검사하듯 눈을 맞춘다. 껌껌한 200m, 갈재 옛길을 걷는 이벤트성 코스 같다. 출구에 다 오니 큰 바윗덩어리 서너 개가 깔끄막에 걸터앉아 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렵게 올라오니 도로공사에서 만든 커다란 월동자재 보관창고가 염수저장 탱크를 안고 있다. 호남터널 중앙에선 굴착기작업이 한창이다. 도로를 다듬고 있었다. 이 추운 날씨 속에서. 터널 오른쪽 눈 속에 묻힌 길을 더듬더듬했다. 묘지길을 지나자 철조망이 보인다. 참호가 있다. 삐삐선(군사용 통신선)도 깔려있다.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것들이다. 숲 속에 들어서니 발이 푹푹 빠졌다. 눈 속에 빠지고 낙엽 속에 빠졌다. 무릎까지 잠겼다. 눈 속에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푹신하기 곳곳에 허방을 만들어 놓았다. 한 해, 두 해, 세 해, 네 해 계속해서. 썩은 몸 위에 또 썩어 갈 몸을 눕히며 나뭇잎들은 그렇게 또 다른 삶을 잇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떨어지고 쌓인 걸까. 사람이 끊긴 길의 공통점이다. “깊은 눈길은 두발로 걷으면 안 됩니다. 두 손을 발 삼아 겨야 한결 수월해요. 이런 눈길에서 능선을 찾으려면 쪼그린 자세로 앉아 보면 감을 잡을 수 있다.”박래철(48) 정읍중 교사는 정읍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지리가 전공인데 역사지식도 해박하다. 문화유적, 옛길 등 답사도 많이 해 지역에서 유명한 사람이다. “이것을 보세요. 멧돼지가 유숙했네요. 저것은 노루 오줌입니다.” 눈속에서 보이는 것마다 그는 설명하기 바빴다. 관심과 열정의 산물일 게다.

길손을 안내하는 옛길 흔적들

길의 생명은 무엇일까. 사람이다. 소통이다. 갈재 옛길은 사람들이 다니질 않아 없어졌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 예측은 빗나갔다. 40㎝ 눈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너무 예뻤다. 3부 능선부터는 조금씩 단절된 윤곽이 5부 능선에선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너무 반가웠다. 갈재가 가까워지자 군령마을이 아련하게 보였다.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호남터널 콧구멍 속으로 들락거렸다. 눈길을 20여 분 더듬고 헤치며 전진하자, 나뭇가지 사이로 재가 보였다. 동쪽 입암산(626m)과 서쪽 방장산(742.8m) 사이의 가장 낮은 부분, 안부(鞍部)에 해당된다. “갈재다” 정창환 정읍문화원장이 소리쳤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 구더기 속을 헤쳐 온 보람이 있었다. 피로가 순간 가셨다. 폭이 2m, 길이 10여m 되는 그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암벽을 만져보고 쓰다듬어 보았다. 우마차 통과를 위해 인위적으로 바위를 깨부순 흔적이 보인다. “남도의 관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부임하던 관리가 넘었고, 소장수 봇짐장수도 넘었다. 귀양길의 선비와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도 넘나든 사연 많은 고개다.” 정창환 원장은 암벽에 새겨져 있는 금석문에 관심을 보였다. <府使洪侯秉瑋永世不忘碑 壬申九月>라는 글귀가 오른쪽 바위 중간에 새겨져 있었다. 장성 부사 홍병위의 불망비다. 그가 어떤 치적을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인위적이다. 장성면지에 홍 부사는 1871년 5월13일에 부임하여 1872년 12월15일까지 근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후 홍병위는 1881년 부총관으로 임명됐다. “갈재 바위 위에 있는 저 소나무 좀 보세요. 세월이 뭔가, 생명이 뭔가, 역사가 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김성실(60·정읍 수성동)화가는 소나무에 주목했다. 북풍을 피해 남쪽으로 만 가지를 키운 소나무의 모습에서 그림 소재를 생각한 것 같다. 그는 “인생살이에서도 저런 소나무 같은 사람이 있다. 팍팍하고 알아주지 않아도 한 우물만 파는 사람들이다. 이 시대에 귀한 사람들이다.”고 말했다. 갈재를 전통지리학의 산줄기 개념으로 보면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영산기맥’(내장산 부근 순창새재∼목포 유달산)의 줄기에 만들어진 고개다.



고개넘으면 동진에서 영산수계로

‘종착역을 아직 묻지 않아도/장성 갈재 넘으면/긴긴 여행은 끝나는 것 같다

쫓겨온 듯 지난 길을/이제 비로소 되돌아보며/죄 있어 잡혀도 안심인 듯/행여 잘못 있더라도/너그러이 용서해 주리

뭘하고 오느냐고 묻지 않아도/장성 갈재 넘으면/지난 것은 모두 잊어 버린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껑충 뛰어/어머님 품인 듯 내리고 싶은 곳/어딘들 사립문들이 열려 있어서/된장국 냄새 확 코를 찌른다’

최일환의 시<장성갈재 넘으면>이다. 최 시인의 표현처럼 갈재는 어머니 품 같다. 포근하고 안옥하다. 특별한 것이 없어서 그럴까. 얼른 보면 고창 운곡저수지 곁에 있는 동양최대의 고인돌같이 생겼다. 낯익은 동네아저씨를 닮았다. 구수한 된장국을 담은 뚝배기 정감이다.

갈재는 길 전시장이다. 옛길, 신작로 길(옛 국도 1호선), 새 고속도로, 옛 기찻길,새 기찻길 등. 고속철도길까지 포함하면 모두 8개다. 옛길부터 최첨단 길까지 다 모여있다. 갈재는 영남대로의 문경새재처럼, 옛 삼남대로의 '노령새재'로 호남지역 남북을 연결하는 대동맥이다. 지금도 국도,고속도로,철도,고속철도가 줄줄이 갈재를 넘어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갈재는 혼맥(婚脈)이다. 정읍과 장성사람들이 혼인할 정도로 교류가 잦았다. 목란마을 사람중 8명이 정읍과 고창,김제사람들과 결혼했을 정도다. 이웃동네처럼 재너머 시집가고, 고개 넘어 장가들었다.

갈재를 통과하니 내리막길이다. 여기서부터 행정구역은 전남 장성 북이면이다. 물길은 동진강 대신 영산강의 수계다. 분수계다. 옛길 흔적 찾기가 또다시 시작됐다. 골짜기를 따라 무작정 내려갔다. 눈 속에 묻힌 잡목과 가시덤불을 제치기 20여 분. 길 흔적이 발견됐다. 그 길을 쭉 따라가니 국도 1호선 신작로 길과 연결됐다. 맞다. 이곳이 장성갈재 초입이다. 옛 지도를 보면 옛길과 신작로가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송전탑 아래 석축한 곳이다.



아련한 목란마을 ‘목련전설’

신작로 옛길(?)로 500m가 가니 목란마을 안내판이 마중을 나왔다. 오른쪽은 구목란,왼쪽은 신목란마을이다. 가까운 구목란 마을로 발길이 향했다. 목란(木蘭)은 나무에 피는 난이라는 뜻으로 목련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이다. 꽃의 모양이 함지박 모양이라 하여 함박꽃나무, 개목련나무, 산목련나무, 목란, 산목란, 천녀화하고 부르기도 한다. 공봉호(77·구목란마을)씨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50년대에 목란나무가 마을에 많이 있었다. 꽃이 만개하는 여름이면 동네 전체가 하얗다.”고 말했다. “그땐 버스가 안다녀 걸어서 갈재를 넘어 정읍장에 가서 보리도 팔고,채소도 팔곤 했다.” 콘테이너 노인정에서 구수한 옛 이야기를 풀어놨다. 김정수(81·신목란마을)씨는 군산 옥구출신이다. 13세 때 아버지 직장을 따라 이곳으로 이사 왔다. 아버지는 철도청에서 일했다.“ 78년에 취락구조개선사업으로 이곳 신목란이 생겼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과 고건씨가 함께 여기에 왔었다.”며 그는 마을 유래를 설명했다. “마을입구 쪽에 주막이 있었다. 갈재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쉬기도 하고 갈증을 풀기도 했다.”

조선말엽 쇄국정책을 펴다가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세력다툼에 밀려 권좌에서 물러났던 대원군. 그가 전국을 유람하다가 호남땅을 밟은 적이 있었다. ‘文不如長城(문불여장성)’이라 했다. 출중한 문장은 장성만한 곳이 없다는 뜻이다. 하서(河西)와 노사(蘆沙)를 비롯해서 출중한 문장가를 배출하고 학문의 기상이 높은 곳이었기에 그런 말이 나왔다고 한다.

갈재 옛길은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수다 떨며 걸을 만하다. 약간의 정비를 하면. 이미 시간처럼 지나와 버린 길이지만 마치 어제와 본 길인 양 포근하고 아늑했다. 무성하고 현란했던 그 옛날의 역사가 가라앉아 있다. 그래서 지금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갈재의 겨울 숲이 깨어나면 옛길도 부활하리라. ‘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 구름이라도 쉬어 넘는 고개/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라매라도 쉬어 넘는 고봉 장성령 고개/ 그 넘어 님이 왔다 하면/ 나는 아니 한 번도 쉬지 않고 넘으리라.’ 장성에 내려오는 노랫말이다. 옛날에 사람들은 군령에서 목란까지 1시간30분 내외로 갈재를 넘나들었다. 로드다큐팀은 길찾기와 쌓인 눈으로 2시간30분 정도 걸렸다. 봄이 오면 한 번도 쉬지 않고 다시 넘어보고 싶다. 장성 노랫말처럼.

기획특집팀=김호일·하대성 기자ha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