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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정읍이야기

정읍의 연혁과 문화재 개관(전영래 박사)

 

정읍지방문화재 地表조사보고서』발췌정리

 1986년 전주시립박물관 (전영래)

 

▣ 정읍시의 연혁

현 정읍시는 본시 고부군과 태인, 정읍 두 현을 합친 것이다. 삼국지 위지의 한전(韓傳)에 나오는 마한(馬韓) 54국 중에서 해당하는 小國名을 대응시켜 보면, 고부는 ‘狗素國’ , 정읍은 ‘楚山塗卑離國’이다.

 백제시대 이후의 연혁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지리지를 비롯하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당시

고부(古阜)는 개화(皆火, 뒤에 부령), 흔량매(欣良買, 뒤에 보안), 상칠(上柒, 뒤에 흥덕) 곧 부인․흥덕지방까지 영현으로 두었다. 뿐만 아니라 고부는 백제시대의 5방성의 하나인 ‘中方古沙夫里城’이었다.

태인(泰仁)은 본래 大尸山郡에서 大山郡, 太山郡, 泰山郡으로 변하였고, 속현으로는 井邑縣(원래 井村),  仁義縣(원래 賓屈縣에서 武城懸으로), 巨野縣(원래 也西以縣에서 也西縣으로)을 포함했다. 대시산군은 지금 칠보면 시산리에 있었고, 빈굴현은 지금 신태인읍 동방 백산리에 있었다. 야서이현은 지금 감곡면을 포함한 금구 원평리 일대였다. 정촌현은 현 정읍인데, 대시산군의 영현으로 현 정읍시내와 소성, 입암, 북, 내장면이 포함된다.

고려시대 이후의 연혁을 동국여지승람에서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태조는 일찍이 백제의 지방 중심지였던 고부(영주=瀛州)에 관찰사를 두었고, 광종대에도 안남도호부를 두어 전북지방의 행정중심지였는데, 현종9년에는 도호부를 전주로 옮기고 다시 고부라 부르게 되었다.

태산(현 칠보면)과 인의(현 신태인읍)를 합쳐서 그 중간지점(현 태인면)에 고을터를 옮긴 것은 태종 9년이고 태인이라 불렀다.


▣ 정읍지방 문화재 개관


1. 선사시대(先史時代) 유적

 선사시대 유적은 대부분이 지석묘이고 그외에 1개소의 주거지, 井戶遺構가 알려져 있다. 지석묘는 총 14개소에 64기가 있다. 대부분이 남방식인데, 15기가 1군을 이루는 고부면 만수리 지석묘군이 가장 규모가 크다. 그중에는 경지정리로 파괴 이동된 것도 있고 도로확장으로 멸실된 곳도 있다.


2. 성지(城址)

 성지는 邑城과 山城으로 구분되는데, 삼국시대~고려시대에는 읍성도 山上에 있었다. 백제시대 중방고사부리성은 고부에 있었는데, 지금 영원면 은선리 금사동산성에 比定된다. 산성의 기원은 고구려에 있는데, 고구려는 평시 토성과 전시 산성이 병존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금사동 산성 북방의 토성은 ‘옥터’라고 불리는데 그러한 삼국시대의 평시 官衙址였을 것이다. 고려시대 이전의 읍성지로서는 무성리산성(대시산군-현 칠보), 柏山城(빈굴현-현 신태인), 고부 舊읍성, 정읍 楚山城 등을 들 수 있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은 13개소에 이르는데, 그 중에는 낮은 구릉상에 설치한 토성도 있다.


3. 고분(古墳)

 고분은 거의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서 지금까지 16개소가 알려지고 있으나, 그 중 9개소는 滅失된 것이고, 이번 새로 확인된 곳은 3개소에 이른다. 나머지 3개소는 필자에 의해서 조사된 곳인데 두가지 유형의 구조가 확인되었다. 곧, 운학리․지사리고분은 봉분(封墳) 정부(頂部)에 석곽을 시설한 수혈식(竪穴式=구덩식)인데, 은선리 고분은 6세기~7세기 중반에 걸친 횡혈식 석실분(橫穴式=굴식, 石室墳)이다.


4. 불적(佛蹟)

 불적은 석불14구(그중 3구는 멸실), 석탑 11개소(3개소 멸실), 幢竿支柱 2개소, 동종 1건, 부도전 1개소, 석불좌대 1건, 석등 3건, 사지 5건, 사찰․암자 7개소에 이른다. 그 중에는 삼국시대 석불이 있다. 지정문화재는 보물 2건, 지방유형 5건이다.


5. 건축물 사적

 건축물 사적은 건조물 6건, 기념물 사적 25건이다. 5건 중에는 동학농민 전쟁관계 유적인 전봉준 舊家․ 황토峴 戰迹地․萬石洑址 등 3개소가 포함된다. 또한 토목 유적으로 고부 訥堤, 水城址가 있다. 서적 3개소, 지방유형 기념물 3개소가 있다. 이번 조사에서 수성지의 발견은 삼국시대 중방성의 도시배치와 교통입지를 구명하는 큰 성과라 하겠다.


6. 민속자료

 민속자료는 기왕에 산외면 오공리 김동수씨가옥이 민속자료 26호로 지정되어 있고, 칠보면 백암리 남근석과 태인 성황당 申潛像이 지방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이번 조사에서 입석 17개소에 25건, 樹木 3개소, 鳥杆 1개소를 발견하였다. 이들은 농경의례에 관계된 줄다리기 당산이다. 의외로 줄다리기와 立石의 분포가 조밀하다. 대체적으로 正月 15일에 새끼줄을 꼬아, 남녀가 갈라져서 줄다리기를 한 다음, 동네어귀의 입석이나 巨樹에 감아두는 의식이다. 中近世에는 읍성에 城隍祠․社稷壇․厲壇이 있었는데, 태인 성황사만이 그 흔적을 남겨주고 있다.


7. 書院․祠宇

 서원․사우는 유교문화가 昌盛했던 조선조의 시대적 所産이다. 27개소가 확인되었는데 대부분이 巨儒와 先祖를 享祀하며 후학양성의 사학기관이었다. 賜額이 내린 곳은 武城書院을 비롯하여 南皐․考巖․旌忠의 4개소이고, 고종 5년 毁撤된 곳이 11개소로서, 무성서원만이 제외되었다. 이 중 고암서원을 제외한 10개소는 재건되었고, 그밖에 16개소는 대부분이 해방이후에 건립된 것으로서, 문화재적 보존가치는 희박하다. 현재까지 정충사․西峴祠․遺愛祠가 지방기념물로 지정되고 있다.


8. 樓亭閣

 루정각 15개소가 조사되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보물 239호인 태인 披香亭(중종 18년 창건, 숙종 42년 중건)이고, 여타 건물은 그 창건 연대가 조선조 전기까지 올라가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이 1,900년대 이후의 것으로서 건축사적 가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유래로 보아 창건 연대가 알려진 것은 피향정 외에 閒亭(중종8년), 浩浩亭(선조대), 暎波亭(선조34년), 君子亭(현종 14년)등을 들 수 있다.


9. 典籍類

 전적류는 功臣錄券 3건과 敎旨, 勅旨(칙지) 등 공문서 91건이 조사되었다. 태조 4년의 김회련 原從 功臣錄券(보물 437호),  昌山君 張寬 원종공신록권(보물 726호)에 이어 최근 태조 원년의 義安伯 李和 開國功臣錄券(국보 232호)이 이종섭씨 家藏으로 밝혀져 國寶로 지정된 것은 정읍지방으로서는 큰 意義가 있다.

공문서는 태조 4년, 6년의 김회련 王旨 2건을 비롯 敎旨 79건, 勅旨․勅命 7건, 科狀 1건이다. 왕지․교지․칙명은 도합 90건으로서 이를 내용별로 보면 贈謚 5건, 贈職 19건, 贈夫人 23건, 及第 6건, 入格 7건, 存職 28건, 陞品 2건이다. 비교적 많은 공문서가 가장되어 있었던 셈이다.

연도별․종류별․내용별로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정읍출신 인사들의 문집도 적지 않으나, 현존하는 板木은 드물다. 도계서원 鰲峰集(숙종 21년), 苔川集(숙종 27년)등이 있을 뿐이다.


10. 碑閣 旌閭

 비각 정려 121개소, 146건이 조사되었다. 旌閭는 忠․孝․烈을 조정에서 명정(命旌)을 내려 포상(襃賞)한 것인데,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정각(旌閣)내에 碑를 세우거나 정판(旌板)을 걸고 또는 旌門을 세우기도 한다. 근래에는 이를 간소화하여 정각형태를 石造로 飜案한 것도 있다. 이를 石旌이라 부르기도 한다. 석정은 철종대 곧 19세기 중반경에 발생하여 고종 20년 이후에 유행하였는데, 현대에도 만들어지고 있다. 특히 정읍지방의 특색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정판은 정각에 2~3매 이상씩 걸린 곳도 있다. 부부의 효열, 부자이효 또는 충․효․열 삼강 등이다. 정려를 정각의 비, 판과 정문 석정 등을 합하여 내용별로 보면 충신 6, 효자46, 열녀 24, 효부 3이다.

비석은 비각 내에 안치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 露碑이다. 정려 이외의 비는 67건인데, 내용별로 보면 善政碑․不忘碑․去思碑 등 지방관의 행적을 칭송하는 것으로서 정려가 관의 명정에 의해서 세워진데 반하여 이들은 지방민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다. 선정비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태인의 신잠현감 선정비이다. 선조대는 정읍의 尹晫현감, 고부의 許鉉군수, 인조대는 고부의 김光璲군수, 태인의 李某현감 등을 들 수 있다.


11. 기타

미술공예, 회화 3건, 縣額(禦筆) 1건과 陶窯址 4건이 조사되었다. 불교조각, 銅鐘 등은 편의상 4, 佛籍편에 포함시켰다. 禦賜閣의 태평연도는 영조대의 것이나 후세에 加筆한 흠이 있는 것이 아쉽다. 초상화는 19세기말 蔡龍臣 작품이다. 도요지로서는 백제(5세기)도요지가 화룡리(소성면)에서 보고되었으나, 현장은 멸실되었다. 수청리(칠보면)는 3개소의 16세기(조선조 전기)民窯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