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읍에 4일간 폭설이 내렸는데, 2년 전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전국지리교사모임의 학회지인 '아우라지'에 올렸던 글을 여기에 소개합니다. ........................................................................................................
호남 서해안에 쏟아진 눈 폭탄
정읍여자중학교 교사 박래철
* 정읍 충무공원내 비석군에 쌓인 눈 풍경
[글쓰기에 앞서]
나는 평소 거절을 잘 못하는 타고난 성품 때문에 스스로 그 일을 잘 처리도 못하면서 대책 없이 맡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속 없이 항상 분주하게 살아간다. 요즘은 그런 나의 성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긍정적으로 살기로 했다. 가끔 심심풀이 토정비결이나 사주팔자를 보더라도 공사다망(公私多忙)한 운명으로 인생풀이가 나오곤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능력을 갖춘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고, 또한 누군가는 이런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려운 일도 곧잘 수용한다. 이글도 마찬가지로 나의 콘텐츠 부재와 글쓰기 능력부족을 잘 알면서도 그냥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재료도 부족하고 솜씨도 없는 요리사가 베테랑인 척하는 우스운 꼴은 아닌지 크게 걱정된다.
이글도 지난여름 전지모 답사부에서 추진한 울릉도 독도연수 때 소감문이 일부 채택된 인연으로 또다시 부탁을 받게 되어 쓰게 된다. 그리고 이글을 부탁한 ‘아우라지’ 편집부장님의 가녀린(?) 목소리를 거부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글은 지리교사가 바라보는 세상이라는 에세이 형식이라 특정한 주제 없이 본인이 주제를 찾아서 써야 된다고 하니 그저 막막할 뿐이다. 며칠째 고민 끝에 이제야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차라리 우리 지리교사들에게는 답사후기가 가장 편하게 쓰이는 글일 것이다. 메모한 자료가 풍성하다면 구슬을 실로 꿰듯 이어주기만 하면 되니깐.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주제가 없어 이번 호남 서해안에 큰 피해를 주었던 폭설 소식에 대해 내가 사는 정읍을 중심으로 얘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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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읍(井邑)이라는 지명이 심심치 않게 중앙뉴스에 자주 오르내렸다. 바로 호남지역에 내린 엄청난 폭설의 중심에 해당하는 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년의 기상 기록과 우리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가히 하늘에서 쏟아진 폭탄 같은 눈이었다. 마치 하늘이 뻥 뚫리기라도 한 듯 20일 동안 거의 하루간격으로 쉴 새 없이 내리고 또 내렸다. 원래 이곳 정읍은 주변 고창, 부안과 더불어 겨울에 다설 지역으로 눈을 보며 낭만을 얘기하고 내장산의 설경을 자랑하던 곳이다. 그런데 초겨울이 시작된 12월의 하늘은 공포심을 갖기에 족한 엄청난 폭설을 쏟아 부었다. 12월 4일 첫눈이 내렸는데 그 이후 22일까지 7일간을 제외하고 계속 내린 것이다. 가히 설국이라 할 정도로 호남지방은 눈 속에 푹 파묻혔던 것이다. 온통 하얀색 일색이다.
정읍의 지자체에서는 몇 년 전 눈 축제를 정해놓고 눈이 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너무 다른 상황이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이 날짜를 정해놓고 하늘더러 거기에 맞춰 눈을 내리라고 하는 격으로 요즘 유행하는 ‘맞춤형’ 눈 축제인데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해에는 ‘눈 축제’라는 말 대신 지혜롭게 ‘겨울축제’로 이름을 고쳤었다.
눈 때문에 학교들도 대부분 2번 이상씩 휴교를 하였다. 아이들은 그래도 마냥 눈을 좋아하는데 어른들은 이제 눈이라고 하면 징그럽다고 한다. 그리고 겁난다고도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많이 내린 눈을 전라도 사투리로 “징허게”, “겁나게” 내린 눈이라고 한다. 흰색을 실컷 보아서 그런지 이제는 흰색이 지겹기까지 하다. 아마 정읍시민들은 설상가상, 설왕설래, 백설기 같은 단어만 들어도 ‘설’자 때문인지 질린다고 할 것이다.
정읍지역은 고창, 부안지역과 더불어 최대 적설량을 보인 지역인데 전체 누적 강설량 약 170mm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는 사람 키에 해당하는 높이로서 예년에 볼 수 없었던 대단한 눈이었다. 아마도 정읍 기상관측소 기록상 12월 강설량으로는 최고의 기록일 것이다. 특히 이번 폭설은 한파까지 겹쳐 녹을 틈도 없이 쌓여 웬만한 비닐하우스, 축사, 조립식 건물 등이 힘없이 무너졌고 눈이 멈춘 지금도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다. 어제는 정읍시내 한 학교의 체육관 지붕이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는데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건축물들이 무너질지 그리고 어떻게 복구할지 걱정이다. 특히 도시지역보다는 시골지역에서 시설원예와 축산업(한우의 경우 전국 2위)을 하시는 농가의 피해가 클 것 같아 여기에 대한 정부차원의 적절한 보상도 이루어져야겠다. 일본에서는 지진을 대비하여 건축물에 내진(耐震)시설을 하듯 우리나라의 다설 지역에서는 지붕에 쌓이는 눈의 무게를 감안하여 건축물을 설계 시공해야 할 것 같다.
기상청의 일기예보에 의하면, 앞으로 서고동저형 기압배치가 북고남저 형으로 바뀌게 되어 호남지역의 폭설이 멈추고 이제는 태백산맥의 동쪽 즉 동해안을 중심으로 눈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다. 다시 말해 12월에는 서고동저형으로 나타나 서해안에 눈을 내리고 1, 2월에는 북고남저 형의 기압배치로 바뀌어 주로 태백산맥의 동쪽사면에 눈을 많이 내린다고 한다. 한편 이런 상황에서도 울릉도와 제주도는 기압배치의 변화와 무관하게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북서풍과 북동풍을 모두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최대 다설 지역은 앞에서 말한 두개의 섬 지역으로 여겨진다. 다만 울릉도는 제주도보다 고위도에 위치하여 눈이 녹는 속도가 느려 예로부터 ‘우데기’같은 특수한 가옥구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와 반면 제주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수직적 기온 분포를 보이기 때문에 난대성 기후를 보이는 해안가의 주민 거주지역은 겨울에도 눈으로 인한 피해나 불편한 점은 적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드디어 20일 정도의 눈 전쟁이 이것으로 마무리 되려나 보다. 그래서 오늘 시간을 내어 정읍시내를 둘러보았다. 시내 곳곳에서 그동안 길가에 쌓였던 엄청난 눈덩이를 포크레인과 트럭을 이용하여 치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또 주변 산에도 올라가 보았다. 곳곳에 눈덩이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줄기가 부러지고 통째 쓰러져버린 나무들이 많았다. 마치 폭탄을 맞은 듯 그 피해가 심각하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잎사귀를 떨어뜨린 낙엽수는 대부분 멀쩡했고 그 피해는 주로 소나무 같은 침엽수림에 집중되었다. 겨울에도 푸른 나뭇잎을 유지하는 상록수가 어찌 보면 지조(志操)의 상징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때는 아주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올해는 유난히 자연재해가 심했다. 여름엔 이곳 정읍의 서부평야지역을 중심으로 홍수피해가 심하여 아직까지 충분한 복구와 보상이 끝나지 않았는데 설상가상으로 눈 피해까지 겹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정읍, 고창을 중심으로 하는 노령산맥의 말단 지역에 눈이 집중되는 이유를 풀이해보자. 일반적으로 호남 서해안의 강설현상은 한랭 건조한 시베리아 기단의 북서풍이 서해바다의 따뜻한 수증기를 잔뜩 머금고 한반도로 상륙하면서 눈을 뿌린 결과이다. 그런데 같은 서해안에서도 남쪽지역인 호남지방에 눈이 제일 많이 내리는 이유는 북서풍이 서해안을 대각선 방향으로 통과하면서 바다를 통과하는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어져 수증기의 양이 많아진 결과이다. 그리고 호남지방 내에서도 특히 정읍, 고창, 부안, 영광 지역을 중심으로 강설량이 돋보이는 이유는 노령산맥의 줄기들이 해안 가까이 뻗어있어 병풍처럼 펼쳐진 산줄기에 서해를 건너온 눈구름이 가장 먼저 정면으로 부딪히며 눈덩이를 내린 결과로 보인다.
한편 전북의 다설지 정읍, 고창, 부안, 순창, 군산 중에서도 고창의 강설량이 조금 더 앞선다. 그래서 예로부터 고창을 눈이 많은 곳이라 하여 일명 ‘설창’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정읍(井邑)도 이제는 물의 뜻을 갖는 정읍 또는 샘고을 대신 ‘설읍’이나 ‘눈고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눈이 녹아 물이 된다고 한다면 할말 없지만 말이다.
이번 12월의 대 폭설은 우리나라 서해안과 제주도, 울릉도를 강타했는데 국제뉴스에 의하면 중국의 산둥반도 일부와 일본의 서해안 지역(동해와 접해있는 지역)도 그 피해가 심각하다고 한다. 이렇듯 한반도를 중심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3개 나라에 눈피해를 크게 주게 된 것은 몽고내륙에서 발달하는 이른바 한랭 건조한 고기압의 시베리아 기단이 예년의 주기적 변화(3한4온)를 뛰어넘을 정도로 그 세력이 커졌다는 것이 1차적 원인으로 보여 진다. 이에 따라 남쪽의 기단과는 상대적으로 큰 기압 차이를 가지게 되고, 뚜렷한 기압골의 차이는 강풍을 형성하게 되어 해안지방에서는 태풍만큼이나 강한 바람의 피해도 있었다고 한다.
눈 폭탄이 형성된 또 다른 원인은 한반도 주변바다가 예년보다 급격히 더 따뜻해져버렸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즉 영하 20도 안팎의 차가운 북서풍이 남하하면서, 난류로 인해 섭씨 10도 정도의 수온을 갖는 한반도 주변바다를 통과하게 되고, 여기서 강하게 공급되는 수증기가 결국 눈으로 응결되어 한반도와 일본의 서해안 지역에 눈 폭탄을 퍼부었던 것이다.
뉴스에 의하면 호남의 폭설사태와는 달리 정작 다설지로 유명했던 대관령을 중심으로 하는 강원도 지방에는 건조주의보가 내려지고 식수가 부족할 정도라고 한다. 한반도의 지형과 기압배치의 특성으로 인해 달리 나타나는 이 겨울의 강설량, 우리사회의 경제적 양극화 현상만큼이나 불공평한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현상, 기압 배치가 어떻게 변하든 소백산맥으로 가로막힌 영남지방 특히 경남지역은 눈이 별로 내리지 않고 내린다하더라도 기온이 따뜻하여 쉽게 녹아버리는 곳이다. 그래서 경상도는 항상 눈을 그리워하는 지역이라는 사실에 한편으로 측은하기도 하였지만 요즘에는 오히려 눈 피해가 없어 부러워지는 상황이기도 하다. 뭐든지 적당한 게 좋은데 인간이나 자연이나 그러지 못해 탈이 나는 것 같다.
뒤돌아보면 2005년 올 한해, 세계적으로 자연재해가 빈번히 발생했다. 특히 우리나라 여름철의 수해와 태풍피해, 겨울철의 눈 폭탄, 그리고 미국의 허리케인 피해, 동남부 아시아의 지진에 따른 해일피해 등이 단순한 자연현상이라기보다는 화석연료의 과다사용과 산림남벌 등으로 인한 이른바 ‘온실효과’가 지구 전체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자연재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결과로 보여 진다. 과연 지금의 전 지구적 자연재해 현상을 단순한 자연재해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의 결과로 빚어진 자연의 보복으로 볼 것인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번 정읍의 폭설을 대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자꾸만 영화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 같은 장면이 오버랩 되는 것은 지나친 나만의 기우인지 아니면 이미 자연의 보복은 시작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2005.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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