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 주동의 신비한 장군 바위 | ||||||||||||||||||||||||||||||||||||
나주나씨 선산 중턱... 사람이 눈밭에 누었다 방금 일어난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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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내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던 전설의 바위, 장군바위를 찾아갔다. 이미 김동필선생이 정리하여 발간한 ‘정읍의 전설’에도 소개되었지만 전설에 따른 구체적 사진자료가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에 기회가 되어 찾아갔다. 장군바위의 소재를 알고 있는 소성면 주천리 반월마을 이장님이 안내했다. 좁은 논두렁의 잡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나갔는데 잠시 후 나지막한 산 아래 장군바위가 그 신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람이 눈밭에 누었다 방금 일어난 모습의 장군바위 장군바위는 전설의 내용대로, 마치 사람이 눈밭에 누웠다 방금 일어난 것처럼 신체의 특징을 선명하게 나타내주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 신기함에 무척 놀랄 것 같다. 하지만 필자는 지리학도답게 주변 지형지세를 살펴보았다. 이 바위는 규모로 보아 다른 데서 이동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상상력을 발휘해본다. 이곳은 위치상 골짜기이며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지만 아래쪽에 농사용 방죽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시냇물이 이 바위 위를 자연스럽게 흘렀을 것 이다. 지금은 바위 주변의 흙이 깎여서 바위가 겉으로 노출되어 있지만 오래전에는 이 바위가 물길의 바닥에 해당되었을 것이고 물과 토사의 흐름으로 바위는 오랜 세월 서서히 침식작용을 받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물 흐름에 의한 기반암의 침식작용이 암석 성분에 따라 침식속도가 달라졌고(차별침식), 그런 결과가 검은 바위에 부드러운 곡선과 움푹움푹 파인 바위모습을 갖게 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니면 화산작용으로 처음부터 땅속 깊은 곳에서 우연히 이런 모습을 갖추었고 그것이 나중에 지상에 노출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정군바위 모습은 물에 의한 침식작용? 하지만 후자보다는 전자의 추정대로 물의 의한 침식작용의 가능성이 더 클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지형학이나 지질학자들이 더 연구하여 그 결과를 안내문에 추가 반영하여도 좋은 일이겠지만, 전설이 가지는 문학적 상상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해본다. 한편 이곳은 행정구역상 소성면 주천리에 해당하며, 주동마을의 남쪽 산지에 위치한다. 이곳은 나주나씨 선산으로 위쪽에는 묘지가 있었고, 아래쪽으로는 전설속의 방죽과 그 방죽의 물로 농사를 짓는 논들이 펼쳐져 있었다.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길은 소성면 주동저수지 옆 나주나씨 제각을 거쳐 진입하는 방법과 ‘주동주유소’ 앞쪽 ‘삼미슈퍼’ 가게 뒤편으로 진입하는 방법이 있겠다.
보존보다는 시민들이 즐겨 찾게 해야하는 장군바위 이 바위는 바닥에 깔려있음으로 인해 쉽게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고 여름에는 잡초가 반쯤은 덮어서 찾기가 더욱 힘들 것 같았다. 바위 위쪽으로 최근 한글과 영문으로 적혀있는 안내판 하나가 서있어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위치 표시와 전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곳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도록 진입로와 이정표가 없다는 점이다. 이곳이 중요한 역사적 사료는 아니지만 조상들의 지혜와 삶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전설이 깃든 바위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보존대책보다는 시민들이 즐겨 찾고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도록 진입로 정비와 이정표 설치가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김동필선생의 책 ‘정읍의 전설’ 중 장군바위에 관한 글] 먼 옛날에 싸움터에서 돌아오던 장군 한 분이 있었다. 마침 날씨가 칠월의 불볕더위인지라 많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좌우로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널찍한 바위도 있으며 또 그 아래 맑은 물의 방죽까지 있어 쉬어 가기에 알맞아 장군은 달리던 말에서 내렸다. 장군은 물에 뛰어들어 전쟁과 더위에 지친 몸을 마음껏 풀었다. 목욕을 오랫동안하고 물 속에서 나와 옷을 벗은 채 바위 위에 누워 있었다. 장군은 승전하고 돌아오는 길이라서 마음은 승리감으로 충만해 있었으나 오랜 전쟁에 시달려 몸은 너무도 지쳐 있었으므로 곧 잠이 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보니 이미 해는 서산에 얹혀 있었다. 장군은 바위에 누운 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루 속히 내 고향에 돌아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품에 안기고 싶다. 전쟁에서 이 긴 이 승리의 기쁨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내가 이 곳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쉬었음은 몇 년 만에 안아본 안락함이다. 이 곳에 내가 편히 쉬어간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다." 그는 이렇게 생각을 골똘히 몰아가고 있었다. 장군이 몸을 털고 바위 위에서 일어났을 때, 누워 있던 바위에 장군의 모습이 사진처럼 깊이 패어 있었다. 정말로 신비하고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장군이 돌아간 뒤 이 바위를 '장군바위'라 불렀다. 장군바위(세로 3m40cm, 가로 1m30cm, 두께 70cm)는 장군이 누워 있던 머리, 팔, 어깨, 등, 갈비뼈, 궁둥이, 두 다리, 고환(睾丸)등 인체(人體)의 부분이 그대로 움푹 패어 있다. 누구나 한번 구경 가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도 이 곳을 찾았을 때 그 기이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군이 누워 있던 자리에 인체의 여러 자국들이 선명하고 깊게 패어 있음은 오래 간직하고픈 사연이었다. 이 바위 위로는 나주 나씨(羅州 羅氏) 선산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었고, 아래는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둘러싸인 논으로 되어 있으며 잠깐 내려가면 정읍에서 고창(高敞)으로 통하는 큰 도로에 접할 수 있다. 그래서, 논두렁과 산을 경계하고 이 바위는 말없이 누워 있다. 검은 색깔의 바위인데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그 청사(靑史)를 말해주고 있으며 바로 밑에는 장군이 목욕을 했다는 방죽(池)이 지금은 조그마한 연못(세로 10m, 가로 1.5m)으로 변해 있다. 필자는 장군바위를 돌아보고 오는 길에 그 장군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얼마나 장사였기에, 어떤 신통력을 가졌었기에 저런 선물의 자취를 남겼을까? 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고 일고 있었다. 서쪽하늘에 해가 기울고 있었으니 장군이 누웠던 시간도 이때쯤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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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8월 12일 09:35:02 / 수정 : 2007년 02월 18일 08:2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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