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정읍이야기

또 하나의 동막골

뿌리기픈 2007. 12. 9. 20:48



또 하나의 동막골
[탐방]칠보 동막마을에서 영화속 '동막골'을 그리다

 

 

 

최근 한국 영화계에 또 하나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바로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작품의 흥행성공이다. 벌써 관객수 600만명을 가볍게 넘어 700만명을 향해 치닫고 있다. 지금 성적만으로도 역대 흥행성적 4위라는데 어디까지 기록을 깰 것인지 아무도 장담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전쟁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룬 작품으로 종전에 같은 소재로 흥행에 성공했던〈태극기 휘날리며〉와는 또 다른 분위기로 접근한 작품인 것 같았다. 사실적 기법과 환타지 기법이 적당히 섞여있는 이 영화는 재미와 감동 그리고 통쾌함을 모두 전달해주는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되었다.

이 영화속의 동막골이라는 동네는 결국 우리가 지향하는 또 하나의 이상향으로 묘사가 되는데, 비록 현실감은 떨어져도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해주었다. 참고로 영화속 동막골(강원도 첩첩산중의 어느 산골로 묘사됨)이라는 지명의 뜻은 ‘아이들이 막 자라는 동네’ 즉 우리들이 꿈꾸는 이른바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인간적인 세상’을 뜻할 것이다.

 

정읍의 '동막', 유기농 공동체의 꿈을 키우던 곳

필자는 영화를 보면서 똑같은 지명을 가진 정읍의 동막골(정읍시 칠보면 반곡리)을 떠올렸다. 지명은 이미 알고 있었고 마을 앞 도로는 자동차로 달려보았지만 실제로 마을 안쪽까지 가본지는 못했다. 그래서 한번쯤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었고 드디어 2005년 9월 3일 한가한 토요일 오후를 정해 맘먹고 출발을 하였다. 아내와 세 살배기 막내아들 이렇게 셋이서 승용차를 타고 찾아갔다.

정읍 시내권에서 접근하는 방법은 우선 북면과 칠보면 소재지를 거쳐 접근하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내장저수지 아래에서 좌회전하여 칠보산쪽으로 꺽어 고개를 넘으면 수청리가 나타나고, 조금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반곡리 동막의 마을 표지석을 볼 수 있다.

 

 

 

 
마을입구에서 바라본 동막골...뒷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호남정맥임.
그냥 마을 밖에서 바라보면 평범한 산골의 농촌으로 보이지만 영화속 동막골의 분위기와 오버랩되어 신비스럽게 보이기까지 하였다. 약간은 떨리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동네 안쪽으로 옮겼다. 마을 입구에는 버스정류장이 있었고 시냇물과 논들이 좌우로 펼쳐졌다. 마을입구에서 안쪽으로 가면서 골짜기가 좁아진다. 마을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시골동네답게 노인들 모습만 보인다. 천주교 공소가 마을 가운데쯤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주변에 낡은 서양식 목조건물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때 이곳에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유기농 생활공동체를 운영했던 당시 신부님이 마을주민들을 위해 캐나다에 살고 있는 자기 동생의 도움을 받아 여기에 서양식 가옥을 몇 채 지었다고 한다. 전국적인 모범사례가 되기도 했던 천주교 교우촌의 유기농 생활공동체가 구성원들 사이의 알력으로 이상향을 지향했던 꿈들이 결국 깨지고 말았고 지금도 그 후유증이 적잖이 남아있다고 한다. 아마도 인간이 갖는 공동체를 향한 순수한 의지 못지않게 인간을 추악하게 만드는 분배에 관한 욕심과 그로 인한 불신이 작용하지 않았는가라고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정읍의 동막골은 '동쪽의 요새'? 

이제 동막골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알아보자. 먼저 정읍 향리지에는 이곳 지명의 유래를 ‘동쪽에 펼쳐진 막(Screen)’으로 해석해 놓았는데 실제로 마을 사람들과 면담을 나누어본 결과 그런 설명과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동네사람들의 말과 문헌을 보면 동막골의 기원은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다. 즉 박해를 피해 이곳에 피신해온 사람들이 골짜기 가장 안쪽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마련했는데 동네 바깥쪽 사람들이 보면 동쪽의 요새지처럼 보인다고 하여 동막(東幕)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이곳에서 독(항아리)을 만들었다고 하여 원래는 독막이라 부르다 나중에 동막으로 변했다는 얘기도 듣게 되었다. 어떤 설이 더 근거 있는 지는 확실하게 판단할 수 가 없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처음 마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확실하고 그런 사람들이 요새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전자의 설명이 설득력을 가진다고 본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 마을 주민들은 천주교(카톨릭교)라는 단일종교를 통해 이른바  교우촌(마을 중심에 공소가 있음)을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동막골 공소... 마을주민들이 이용하는 천주교 공소

 

 

 동막마을의 서양식 주택이 이채롭다. 카톨릭이라고 하는 서양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속 동막골과 정읍의 동막 


이제 정읍의 동막골과 영화속 동막골을 비교해보자 여기서는 닮은 점을 찾아본다.

첫째가 지리적 공간구조이다. 폐쇄적인 지형지세로 인해 외부와 차단된다는 점이다. 전쟁과 박해를 피할 수 있는 유리한 지세인 것이다.

둘째, 이상향을 만들었거나 시도했다는 점이다. 영화처럼 이곳 정읍의 동막골에서도 한때 원시공산사회라 할 정도로 천주교 신부님을 중심으로 유기농을 하며 살아가는 생활공동체가 시도되었는데 앞서 얘기한 것처럼 결국 그 꿈은 깨지고 말았다고 한다. 영화속에서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절체절명의 위기까지도 주인공들의 희생으로 마을이 지켜진데 비해 이곳은 그 꿈이 쉽게 깨어졌다는 점이 다르긴 해도 그 자체가 의미 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전쟁을 피해 숨어 지낼 수 있는 곳을 풍수지리에서는 승지라고 하는데 전국에 10군데가 있다하여 10승지라는 말이 있다. 이곳 동막골은 지형지세를 살펴보니 10승지는 아니지만 몸을 숨기기에 적합하고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되는 그런 곳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마을 뒤편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바로 노령산맥 줄기로서 산경표식으로 말하면 호남정맥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와 관련하여 동막골의 ‘골’을 고을로 풀어쓰면 ‘마을’이 되지만, 여기서는 말 그대로 ‘골짜기’의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 동막마을에서 원래의 동막골로 올라가는 오솔길

 

  

동막골의 꿈과 어진이네 집

마을의 기원을 알아보면 원래 20가구 정도의 가옥이 골짜기 안쪽(해발고도 약150m)에 있었다는데 한국전쟁 때 빨치산과의 접촉을 우려하여 국군들이 소개령을 내렸고, 이때 약 1Km 아래쪽 즉 지금의 큰 도로 옆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마을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현재 마을 안쪽 즉 옛 마을 터에는 몇 년 전 유기농에 관심을 가지고 이 마을에 들어온 정현숙씨가족이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정현숙씨는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간장, 된장 등 장류를 제조 판매를 하며, 아들 어진이는 현재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인데 산속에 살아서 그런지 무척 씩씩하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비록 전기라는 문명의 혜택은 받지 못해도 자연이 주는 넉넉함을 받으며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 가족이 마냥 부러워 보였다.

 

  

 

 

 

 어진이네 집에서 판매하는, 유기농 장류에 붙는 상표 스티커

 

짧은 시간의 머뭄뒤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산길을 걸어내려오려는 데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내린다.  주인장은 친절하게도 4륜구동의 승용차에  예고없이 찾아온 손님들을 태우고 비포장 산길을 덜컥거리며 내려왔다. 아래쪽 동막의 평범한 농촌분위기와 달리 이곳 안쪽 동막의 분위기는 영화에서 그려진 강원도 깊은 산골의 분위기를 충분히 느끼기에 족했다.

이제 글을 정리해본다. 100여년전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곳에 들어온 이들이 가장 안쪽에 터를 잡을때는 분명  외부와의 차단이라는 입지조건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화 이후에는 한국전쟁이라는 외부적 충격이 없었다하더라도 분명 마을은 교통이 편리한  지금의 아래쪽 동막마을로 그 위치를 옮겼을 것이다. 이와같이 시대변화에 따른 마을입지의 변화는 근대화를 거치면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었을 것이다. 특히 산골마을의 경우 골짜기 안쪽에서 바깥쪽을 향해 그 거주공간이 확대되었음을 동막골의 사례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입력 : 2005년 09월 10일 09:25:08 / 수정 : 2007년 0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