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에서 찾아보는 일제의 흔적 | ||||||||||||||||||||||||||||||||||||||||||||||||||||||||||||||||||||||||||||||||||||||||||||||||
정읍시가지에 남아있는 일식가옥 | ||||||||||||||||||||||||||||||||||||||||||||||||||||||||||||||||||||||||||||||||||||||||||||||||
| ||||||||||||||||||||||||||||||||||||||||||||||||||||||||||||||||||||||||||||||||||||||||||||||||
| ||||||||||||||||||||||||||||||||||||||||||||||||||||||||||||||||||||||||||||||||||||||||||||||||
일제강점기에 우리 정읍에는 어느 정도의 일본인(당시 내지인이라 지칭함)들이 거주하였을까? 이 궁금함을 풀기위해 역시 정읍군지(1936년, 장봉선)를 펼쳐보았다. 이 책 14쪽을 보면, 인구통계자료(호구)가 자세히 제시되었다.
1930년대 정읍거주 일본인 2,546명, 정주-신태인-화호-태인-고부 순으로 거주 당시 정읍군의 전체인구는 16만 660명이며, 그 중 조선인은 15만 7,894명, 일본인은 2,546명, 외국인은 220명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일본인들을 주요 거주지별로 살펴보면 정주 1,204명, 신태인 362명, 화호 158명, 태인 120명, 고부 88명의 순으로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의 수는 정읍군 전체 인구의 약 1.6% 정도를 차지하였으며, 그 중 반절 정도가 당시 정주지역(지금의 정읍시가지)에 살았다는 얘기다.
당시 일본인 거주 뉴타운은 구법원이나 샘골로를 중심으로 한 수성동 일대 일본인들이 정읍에 정착하면서 새롭게 조성한 주요 거주지(뉴타운)는 지금의 구법원이나 샘골로를 중심으로 하는 수성동 일대로 보여진다. 조선인들의 오랜 거주지이며 구상권을 형성하였던 장명동(정읍향교 앞)이나 시기동(구시장 일대)과는 조금 떨어져 위치한 것이다. 이는 조선인들과의 마찰을 피하고 도시의 새로운 확장을 꽤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제 일제강점기 35년의 역사가 끝난지 어언 62년이 지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흔적들도 이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비록 일제강점기가 우리 입장에서는 치욕의 역사였지만, 우리 후세들이 그 아픈 역사의 전철을 다시 밟지않게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그 흔적을 보존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이 곳곳에 서 있는 정읍 최근 정부가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근대문화유산' 사업이 그래서 의미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특히 건축물의 경우, 이곳 정읍에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거나 아니면 당시의 형식을 이어받은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제 점점 사라져가는 일본식 가옥들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기대해보면서 일본식 가옥들을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편의상 일식가옥이 집중되어있는 신태인이나 화호지역은 생략하고, 정읍 시내지역에서 발견되는 건물들을 소개한다.
| ||||||||||||||||||||||||||||||||||||||||||||||||||||||||||||||||||||||||||||||||||||||||||||||||
|
||||||||||||||||||||||||||||||||||||||||||||||||||||||||||||||||||||||||||||||||||||||||||||||||
정읍시내, 시기동(과거 신흥동)에 남아있는 일식가옥. 지금은 사람이 살지않아 점점 쓰러져간다.
정읍시내, 수성동(예전 구미동)에서 본 일식가옥.
'우리고장, 정읍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릴 때 내가 놀던 중사동 (0) | 2007.12.20 |
---|---|
정읍에 전두환 '각하'의 기념비가? (0) | 2007.12.20 |
성터 따라 한바퀴, 소원풀이 했어요 (0) | 2007.12.11 |
국화축제 홍보대사? (0) | 2007.12.11 |
덕천은 정읍의 엘도라도, 고부는 개성, 칠보는 경주... (0) | 2007.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