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정읍이야기

동족상잔의 현장, 행사용이 아닌 체험학습장으로

뿌리기픈 2007. 12. 11. 15:49

동족상잔의 현장, 행사용이 아닌 체험학습장으로

고부 입석리 6. 25 피학살지와 장명동 충무공원 내 묘비와 집단 매장지

 

박래철 ppuri1@eduhope.net

 

 

 

 

 

▲ 고부면 만수리에서 입석리 사이, 두승산 아래쪽에 위치한 피학살지 안내판. 이름이 살벌하여 주민들

은 다른 이름으로 대체하자고 한다.


올해는 한국전쟁(6.25사변) 발발 57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전쟁은 엄밀히 말하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휴전선이라는 이름이 남아있고, 남북이산가족과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의 정서적인 앙금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정읍지역도 예외없이 전쟁의 생채기가 남아있는 곳인데,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을 위해서 몇군데 전쟁관련 유적과 묘비를 찾아가본다.

 

고부 입석리 두숭산 폐광의 '6.25피학살묘' 

   

 

 

▲ 집단학살이 있었던 현장. 폐광앞에는 철책이 설치되어있고 여기서 발굴된 유골의 합동묘가 만들어

졌다.


첫번째 찾아간 곳은 고부면 입석리 두승산 자락에 위치한 해주오씨 제각 뒷편의 '6.25피학살묘'로 불리는  유적이다. 이곳은 지금도 인적이 드문 곳으로 폐광산으로 인한 동굴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9.28서울수복으로 인해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정읍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었던 우익 인사 500여 명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350명 정도는 유치장에 불을 질러 소사(燒死)케하고, 150명 정도는 이곳 폐갱에 끌고와서 집단총살시키고 그 시체를 안에다 매장했다고 전해진다. 유골발굴작업은 당시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던 분들 중 한분이 각계에 호소하여, 1994년에 유골인양위원회가 구성되고 정읍시의 지원을 받아 6개월 만에 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

 

정읍유치장의 우익 인사 500명중 350명은 불태우고 나머지는 폐광으로 

6. 25 피학살지에 가기위해서는 입석리 해주오씨 제각을 지나는데, 운좋게도 마침 근처 밭에서 일하던 당시 유골발굴작업에 기술책임자로 참여하였던 오승용씨(신정동거주, 47세)를 만날 수 있었다. 오씨로부터 피학살지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와 유골발굴작업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당시 입석리 피학살지에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던 사람은 4사람 정도라고 하며, 그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정읍경찰서에서 트럭 2대에 실려온 우익인사들을 이곳에서 집단총살하였다고 한다. 또한 정읍경찰서 유치장 방화과정에서도 살아난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에서도 나오는 끔찍한 장면이 우리 정읍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폐광 학살지에서 4명만이 극적 탈출, 수직 터널 구조로 인양작업도 어려웠고 

그리고 유골인양과정은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하였다. 폐금광의 터널이 거의 수직구조여서 물과 흙으로  덮혀있었던 유골을 인양하는 작업은 아주 험난한 과정이었다고 하며, 그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하여 본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유골은 합동묘지를 조성하여 안장하였지만, 앞으로도 해야할 일이 더 있다고 주장한다. 예산이 뒷받침된다면 유물전신관이 있으면 좋겠고, 이곳을 찾는 이들이 보다 현장감을  가질 수 있도록 폐광앞에 설치된 철책을 제거하고 터널의 입구부분을 드나들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아래는 피학살지 앞에 세워진 안내문입니다.

 

[6. 25 피학살 묘소 조성경위]
  이곳 6.25 피학살 묘는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연합군에 의해 수복되자 인민군들이 1950년 9월 30일
(음 8월 16일) 정읍경찰서에 수감된 반공인사 5백여 명 가운데 150여 명을 이곳 고부면 입석리 폐금광으로 끌고와 몽둥이, 돌, 총 등으로 학살한 후 생매장하고, 나머지 3백 50여 명은 유치장에 감금한 채 타이어에 휘발유를 뿌린 후 불을 질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유치장 방화로 희생된 인사들의 사체 일부는 유족들에게 인도되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나머지는
충무공원에 합동으로 안장(42주지묘) 하였으며, 폐금광 희생자들의 사체는 현장이 30여 m에 달하는 수직갱인데다 동란직후에 사회불안으로 연고자들이 나타나지 않아 매몰된 채로 방치되어 왔다가, 피학살 당시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영원면 앵성리에 사는 고 곽영기옹이 유골인양을 각계에 호소하여 1994년 9월 7일(6.25 피학살 유골 인양 및 안장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당시 정주시 새마을지회장인 이종섭씨를 선출하여 1994년 9월 9일 발굴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발굴 작업이 시작된 뒤 지하 약 30m 지점에서 유골이 처음 발견되었으며 70m~90m 사이에서는 대량으로 발굴되었고, 지하 106m까지 발굴 작업을 실시하여, 1995년 3월 5일 6개월여 간의 작업을 완료한 결과 두개골 20여 구를 포함하여 유골 30상자와 신발 42개, 포승줄 18개, 죽창, 혁띠, 수류탄, 탄피 등이 발굴되었다.  당시 유골인양작업은 각계각층의 많은 시민과 기관단체 및 군부대의 관심과 도움이 있었지만, 인양작업에 필요한 장비와 전문 인력이 없는 매우 열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인명사고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종섭 추진위원장, 김성철 총무, 박석규 현장감독, 오승용 기술책임자 등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오로지 유골을 인양하여 영혼을 위로하겠다는 신념과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영령들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96년 정읍시로부터 2천만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묘역을 조성하고 2002년 정읍시에서 3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묘역 뒤 석축공사 및 진입로, 철책 등을 정비하였으며, 2004년 8월에는 2천만원의 예산으로 묘역 뒤 암반 절개지 및 배수로 공사 등으로 묘역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1995년부터 유선사의 도움을 받아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9월 28일에 제물을 준비하여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다.  (정읍시장)

 

한국전쟁 희생자들의 위패와 기념비가 있는 장명동 충무공원 

 

 

 

  

충무공원내, 충렬사에서 충혼탑으로 오르는 계단의 왼편에 위치한 합동묘.


두번째로 찾아간 곳은 정읍시민들이 즐겨찾는 장명동 충무공원, 이곳에도  한국전쟁 관련 묘소와 묘비 그리고 기념비가 위치한다. 성황산을 오르는 계단의 좌측에는,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33인 중의 한 분인 박준승선생의 묘 옆에 또 하나의 특별한 묘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6. 25사변 당시 정읍경찰서 유치장 방화사건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유골을 합동으로 매장한 이른바 '반공순국인사 42주지(柱之) 묘'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순국한 군경을 위한 기념비와 위패봉안소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올라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충혼탑(거룩한 얼)을 찾아가 본다. 어렸을 적 전쟁놀이를 하며 놀던 곳었는데 그땐 이곳이 그렇게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인 줄 몰랐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곳은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희생된 정읍출신 군경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아래에 충혼탑의 안내문을 소개한다.

 

[충혼탑(거룩한 얼)]
한국전쟁 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산화한 이 고장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상징하기 위하여 1969년 10월 14일 시, 군인, 공무원, 학생들의 성금을 모아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1987년 6월 위패봉안소를 이곳 경내에 세우고 육군중령 고 전순기 외 3300여 명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특히 이 곳은 전후세대들의 호국안보와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고취시키는 안보 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매년 6월 6일 현충일을 맞이하여 정읍시 주관으로 유족과 시민들이 모여 현충일 추념식을 거행하고 1월 1일과 8월 15일에는 참배를 실시하고 있다. 충혼탑의 높이는 9m이며, 위패봉안소의 면적은 20㎡ 이다.

 

2004년 발견된 또 하나의 집단 매장지는 좌익 인사들의 무덤

 

 

 


충무공원 팔각정에서 정상쪽 등산로 옆에 위치한 조그만 기념비.


다음은 충혼탑 위쪽의 팔각정서 산의 정상쪽으로 100 여 미터를 더 오르면, 2004년에 발굴된 또 하나의 집단 매장지임을 알리는 조그만 비석을 볼 수 있다. 듣기로는 한국전쟁 당시 좌익인사들의 집단 매장지라고 하는데, 이들 유골이 왜 이곳에 묻혀있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이들 유골에도 많은 사연이 묻혀있었을텐데......

아래에 기념비 뒷면의 글을 소개한다.

 

[집단 매장 유골 발굴 지점]
이 곳은 2004년 3월 8일 집단으로 매장된 유골 43구와 실탄 탄피 고무신 등 유품이 발굴되어 2004년 7월 29일 정읍시 입암면 연월리 시립묘지에 합동으로 안장하고 위령비를 세움.  2004. 8 정읍시장

 

동족상잔의 흔적, 역사체험 장소로 활용하자 

해방이후 좌우익간 이념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아 발생한 반세기 전의 한국전쟁, 그 동족상잔의 흔적이 정읍에도 곳곳에 남아있다. 이제 남과북이 지난 날의 아픔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들 유적들이 자라나는 2세들에게 의미있는 역사체험의 장소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일방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주는 이데올로기 교육이 아니라,  전쟁을 극복하고 이 땅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방향으로.......

 

입력 : 2007년 07월 08일 17:48:10 / 수정 : 2007년 07월 09일 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