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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야기

글을 깨우친 어느 할머니의 편지글

 해마다 이맘때 늦은 가을이면 열리는 정읍시 평생학습축제 현장에 학생들과 함께 둘러보았다. 공연과 체험부스가 있었는데 그중 눈에 띄는 체험장이 있어 들렀다. 이른바 '문해자'들의 편지글을 전시해 놓은 곳이었다. 오랫동안 한글 문자를 깨우치지 못해 생활하는데 불편하였고 평생 한이 되었을 어르신들께서 말년에 야학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깨우치신 것이다.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조금은 짐작이 된다. 그런 기쁨으로 자식과 주변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직접 육필로 작성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전시까지 하게 된 것이리라. 사람에 따라서는 필체가 반듯하신 분도 있고 아직은 서투른 모습이 역력한 글씨도 있었으나 모두들 정성스럽게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흔적이 보였다.  소박한 글씨와 글솜씨지만 그 속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큰 감동이 내 가슴에 밀려온다. 

 

그 중에서 한 작품을 소개해본다. 이 글의 주인공이 되는 어르신의 양해를 구해야하겠지만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생각하며 올려봅니다. 정읍 산내면 늘푸른학교에서 글을 공부하신 황외순 할머니(당년 67세)가 자녀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격변의 역사를 살아온 분들이 본의아니게 배움의 기회를 놓쳐 문맹의 고통을 당해야만 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비슷한 나이의 나의 어머니의 인생역정을 떠올리면 이분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것 같다. 한국전쟁때문에 다니던 국민학교 1학년 과정을 중단해야했고 딸이라는 이유로 집안일을 도와야 했던 나의 어머니도 동시대를 살았던 분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였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겪으신 우리의 부모님 세대에게 이 기회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드리고 싶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저 미안한 마음 가득해진다.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같은 베이비붐 세대가 나름대로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 않은가? 

 

 나의 어머니께서도 은연중 배움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회한을 자주 얘기하곤 하신다. 살아오면서 스스로 노력하여 더듬더듬 한글을 읽고 조금은 쓸 수 있으나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아직도 초보적인 수준일 뿐이다. 아들된 입장에서 그저 안타까운 마음인데, 늦게라도 문맹퇴치를 위해 애쓰시는 이런 야학기관을 소개하여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나아가 배움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땅에 태어나 문맹의 굴레속에서 살아온 모든 어르신들에게 앞으로 문맹을 깨우치고 스스로의 생각과 마음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골고루 주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르신들을 위해 어려운 환경에서도 참으로 뜻깊은 일을 하고 있는 야학 관계자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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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 늘푸른학교 이름 황외순

 

사랑하는 아들딸들에게

너희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난날이 까마득하다.

 

탈 없이 잘 자라주어 고맙고 나름대로 가정을 이루어

손자까지 선물하니 더욱 고맙다.

 

내 나이 67살. 평생 지금처럼 나 자신을 위하여 살아온 날이 얼마나 될까

이제는 한글학교 학생이 되어 공부를 하게 되고

책가방을 들고 다닌다는 것이 너무 즐겁다.

 

저녁에는 성경도 읽고 시장에 다닐 때도 마음 놓고

버스 행선지를 보고 탈 수 있고 학교에서 좋은 말씀도 듣고

친구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누며 선생님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숙제가 많은 날은 눈꺼풀을 비비면서도 즐겁기만 하구나.

 

그런데 남은 인생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니,

선생님께서 앞으로 20년은 더 살 수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여 모두 웃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 엄마의 부탁은 세상을 정직하게 살고 긍정적으로 살아 건강하게 보내기 바란다.

사랑한다. 그리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