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를 중심으로 하는 정읍의 근세사를 조명할 때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책은 역시 1936년 장봉선 씨가 편저한 '정읍군지'이다. 한마디로 정읍 향토지(鄕土誌)의 바이블이라 하겠다. 그런 ‘정읍군지’ 중 당시 각 읍 면의 현황을 자세히 정리한 '각 읍면 일람'(94쪽부터)편을 살펴본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17개의 각 읍.면을 대표하는 문구이다. 마치 요즘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그 지역의 특색을 요약하여 몇 마디 단어로 홍보하듯이, 당시 정읍군에 포함된 각 읍. 면의 특색을 살려 적절히 표현하였다. 편의상 개요와 연혁만을 요약하여 소개하고 현재의 관점에서 이를 분석해본다.
1930년대에는 시내나 면단위의 인구 분포가 비교적 고른 편
1. “정주읍은 본군의 수부(首府)” - 경성 목포선 1등도로가 시가의 중앙을 관통하고 남북교통의 주요역인 정읍역이 위치함. 호남의 요추(要樞). 호수는 2천 1백여 호, 인구는 약 1만 500 여 명. 정주읍은 옛 정읍군의 군내면, 서이면 지역 그리고 남일면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과거 정주읍 지역은 호남선 철도(대전-목포)와 1번 국도(신의주-목포)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고부와 태인의 중심지 기능을 흡수하면서 호남의 중추도시로 성장하였다. 당시 정읍군의 인구는 약 17만 5천명(1935년 통계)명이며, 그 중 정주읍의 인구는 17개 읍 면 중 가장 많았다.
본문에서는 정주읍의 인구를 1만 500명이라 하였지만, 정읍군 전체 인구수를 감안했을 때 소성면 소개내용에 제시된 1만 6천 명이 더 적합한 것으로 추정한다. 정주읍은 단지 인구만이 아닌 행정과 사회 경제적 기능이 집중되었기에 이곳을 ‘본군의 수부’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기 때문에 인구 분포에 있어서도 오늘날에 비해 읍, 면간에 커다란 차이 없이 비교적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특히 벼농사가 갖는 높은 인구 부양력으로 인해 정읍군의 전체 인구는 전북도내에서는 상위권에 해당하였다. 1960년대 한때 약 28만 명(1964년 통계)에 달했던 정읍시의 인구가 지금은 크게 줄어, 70년 전의 17만 명보다 적은 13만 명 이하로 감소하였다.
또한 현재 시가지(과거 정주읍)에 거주하는 인구를 약 8만 여명으로 추산한다면, 시가지의 인구는 그때에 비해서 크게 증가하였다. 결국 정읍시의 인구감소는 주로 면 지역에서 큰 폭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면 될 것이다.
북면은 산이 반절, 들이 반절...유일하게 남은 방향을 소재로 한 면이름
2. “북면은 산야상반(山野相半)”-곡산(穀産)과 부산물(副産物)이 고르게 풍부함. 북면은 옛 정읍현의 북일면과 북이면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북면이라는 이름은 정읍현의 북쪽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1914년 행정구역변경 때에도 바뀌지 않고 현재까지 사용되는, 정읍에서는 유일하게 남은 방향을 소재로 한 행정구역 명 이다. 북면의 지세를 보면, 칠보산 자락이 북서방향으로 뻗으면서 점점 낮아지는 이른바 구릉성 산지를 이루는 지역인데, 이를 두고 산이 반절이요 들이 반절이라 표현한 것 같다.
내장면, 정읍의 금강
3. “내장면은 정읍의 금강”-일명 남쪽의 금강이라고 함. 조선팔경의 하나. 본 군의 특색이며 호남의 자랑이다. 내장면은 옛 정읍현의 동면과 남일면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풍치가 뛰어난 내장산을 금강산에 비유하였는데, 여기서 단풍과 관련한 구체적 서술은 빠져 있다. 금강산이라 하면 당연히 단풍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일부러 생략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한편 옛 정읍현의 동면에 해당하는 내장면은 나중에 정주읍으로 편입(1982년)되면서 행정구역 명이 사라지게 되었다.
'보천교 없이 입암은 없다'
4. “입암면은 보천교(普天敎)의 근거지”-총 호수(戶數)의 3분지 1 에 해당하는 600 여 호가 순 보천교 인. 입암면은 옛 정읍현의 남이면과 서일면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1909년경 성립한 보천교라고 하는 신흥종교는 교세 확장을 거듭하여1930년대 전반에 정점을 이룬다. 그 중심지인 입암면 대흥리에는 전국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전입하는 인구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입암면은 면소재지인 천원리보다는 대흥리가 더 유명하게 된 것이다.
촌락중의 촌락, 인구조밀했던 소성
5. “소성면은 인구조밀(人口調密)” – 소성면 인구는 1만 1천명으로 정주읍(1만 6천명), 신태인면(1만 4천명), 태인면(1만 2천명)의 뒤를 이어 4위의 인구규모. 소성면은 옛 고부군의 소정면과 성포면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소성면은 일제강점기에 철도교통의 요지(정주, 신태인)와 행정 중심지(태인)를 제외한 촌락 지역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인구를 자랑하던 곳이었다. 고부천 수계의 상류에 해당하는 이곳은 임야보다는 평야가 더 발달한 곳으로 높은 인구부양력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던 소성면이 이후 인접 정주읍, 고부면, 입암면에 상당부분의 행정구역을 떼어주면서 면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정읍의 '개성'은 고부...'몰락한 해양도시'
6. “고부면은 정읍의 개성(開城)” - 옛날 주변 각지의 중심지, 한양의 개성과 비유됨. 고부면은 옛 고부군의 행정중심지로 서부면과 남부면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고부군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해체되고 그 중심기능을 상실한 사실은, 마치 고려의 수도 개성이 조선개국으로 인해 그 기능을 한양에 넘겨준 경우에 비유된다. 과거 조수의 영향을 받았던 시절, 고사부리 지역(고부, 영원 일대)에 고대해양문화가 발달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고부는 몰락한 해양도시 개성에 비교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농민들의 '복된 땅'은 영원
7. “영원면은 농민의 복지(福地)” - 고부, 영원 수리조합의 역할로 가뭄과 홍수의 걱정이 없는 농민의 복지. 영원면은 옛 고부군의 동부면과 북부면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잘 갖춰진 수리시설로 인해 가뭄과 홍수에 대한 걱정이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어 이곳을 ‘농민이 복 받은 땅’이라 할 것이다. 이곳은 고부천 수계의 중류에 해당하는 곳으로 너른 평야 지역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동학의 땅은 바로 이평
8. “이평면은 東學亂의 발생지”- 전봉준이 본 면에 거주하였으며, 처음 거사하던 곳도 여기이며, 처음 대혈전 대승첩 하던 곳도 역시 이 면이다. 조선 아니 동양대세에 일대파문을 일으킨 이 난이야말로 어찌 본 면에 역사적 이적 (異蹟) 이 아니랴? 이평면은 옛 고부군의 궁동면과 답내면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상황에서 동학농민혁명은 비록 동학난으로 명명할 수 밖에 없었지만, 본문에서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정읍사람으로서 자긍심을 갖도록 고취시키는 내용이라 할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일 제정과 관련하여 논란이 고조되고 있는 이 즈음 한번씩 되새겨볼 만한 내용이라 하겠다. 본문에서 ‘처음 거사하던 곳’이란 이평면 말목장터에서 일으킨 고부봉기(민란)를 의미하며, ‘처음 대승첩 하던 곳’은 황토현 전투(현재 덕천면 하학리, 당시에는 이평면 관할지역)를 가리킨다 할 것이다.
정읍의 '엘도라도'는 덕천
9. “덕천면은 금광세계”-두승산 산록에 금광 성업 (盛業). 300 여명의 광부 사용. 덕천면은 옛 고부군의 우덕면과 달천면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화강암이 풍부한 한반도에서는 금광 개발이 곳곳에서 이루어졌는데, 정읍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제 강점기에 두승산을 중심으로 금광이 성황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주는 대목이다. 두승산을 끼고 있는 행정구역으로는 고부면, 당시 소성면, 덕천면이 해당되는데 이중에서도 덕천면 지역이 가장 활발하였기에 이런 별명이 붙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정우가 정읍의 '중앙'인 이유는 태고선과 정신선이 교차하는 초강사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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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선(정읍-신태인)과 태고선(태인-고부) 도로가 교차하는 곳. 그 위로는 호남선철로가 지나간다. 교통의 결절점인라 할 수 있는 초강사거리가 보이는 곳. 이곳이 있어 정우면을 정읍의 중앙지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 같다. |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이긴 하지만, 고속도로와 철도가 발달한 요즘에는 정읍 안에서 역할로 만족하는 정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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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정우면은 본군의 중앙지”- 정우면은 옛 고부군의 정토면(수금면, 벌미면, 오금면)과 우순면(우일면, 장순면)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정우면은 위 내용으로 보아 여려 개의 면을 병합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면에 비해 특별히 그 면적이 넓지는 않다. 대개 한 개 면이 갖는 영역은 도보시대를 감안했을 때 걸어서 발이 쉽게 닿을 수 있는 면적일 것이다. 지금이야 자동차시대이니 일일 생활권의 범위가 더욱 확대되어 이제 면사무소가 폐지되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행정구역은 더욱 광역화될 게 분명하다.
정우면에 붙여진 중앙지(center)라는 별명은 최근 필자가 지형도로 측정한 결과, 수리적 위치로 본 정읍시의 중앙지는 정우면 지역이 아니라 북면 지역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읍통문 기사 ‘이곳이 바로 정읍의 배꼽’ 참조) 다만 당시에 정우면을 정읍군의 중앙지로 인식하게 된 것은 정확한 수리적 위치보다는 인문지리적 인식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현재 정우면의 면사무소가 자리한 초강리의 이른바 ‘초강 사거리’는 태고선(태인-고부)과 정신선(정읍-신태인)이 종횡으로 교차하면서 정읍 지역의 중앙적 위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과거 3개 군현(고부, 태인, 정읍)이 모자이크처럼 합성되어 이루어진 정읍군 지역에서 새로운 교통의 요지로 등장하게 된 정우면 지역이 이런 연유로 ‘중앙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읍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은 태인
11. “태인면은 정읍의 낙지(樂地)” - 지방행정 관아 중심지, 고적과 명승이 즐비, 거산평야의 곡창. 태인시장. 경목선(서울-목포:1번국도)과 태갈선 도로(태인-갈담:30번 국도)가 십자로 관통하여 교통의 요지를 이룸. 태인면은 옛 태인군의 군내면, 인곡면, 흥천면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조선시대 태종 때 태산(지금의 칠보)과 인의(지금의 신태인)를 합하여 태인현이 만들지게 되었는데 그 치소는 지금의 태인면 소재지가 된다. 이곳은 조선초부터 행정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고부와 더불어 정읍군에 통합된 지역이다. 배산임수형의 지형에 발달한 마을과 너른 평야, 편리한 교통과 물산이 교류되는 시장 그리고 선현들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까지 두루 갖추어져 그야말로 ‘살기 좋은 땅’(樂地)이라 부를 만한 곳이었다. 산업구조가 바뀐 지금이야 다른 농촌 지역처럼 날로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정읍의 빅 게이트, 신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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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태인면은 정읍의 관문”- 호남선의 중요 역. 본군 제2의 도회지. 신태인면은 옛 용산면(화호리)과 북촌면(신태인리)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1913년에 개통된 호남선 철도가 통과하는 정읍지역에는 여러 개의 기차역이 있지만, 간이역을 제외하고 여객과 물산이 대량으로 이동하는 큰 역으로는 역시 정읍역과 신태인역을 들 수 있다. 하행선을 타고 서울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읍역보다 먼저 통과하게 되는 신태인역이 그래서 관문이 되는 것이다. 이후 신태인역이 생겨나 이곳이 정읍 제2의 도시로 자리를 잡으니 화호와 태인 지역은 상대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정읍의 곡식창고는 감곡
13. “감곡면은 본군의 곡창(穀倉)”- 군내 제1의 경지면적. 감곡면은 옛 태인군의 은동면, 감산면, 사곡면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감곡면은 아마도 정읍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에 속하는 곳일 것이다. 이른바 삼평 평야가 김제 벽골제로 이어지며 김제평야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지평선이 보인다는 김제와 연결되는 이곳 감곡면은 그래서 ‘정읍군의 곡창’이라는 이름이 제격이라 여겨진다.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옹동
14. “옹동면은 불부불빈(不富不貧)”- 임야(산)에 비해 미작면적(평야)이 작다. 산내면에 비해 인구는 작으나 미작 생산량이 많아 불부불빈(不富不貧)이라 할 수 있을까 한다. 옹동면은 옛 태인군의 옹지면과 동촌면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옹동면은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상두산, 비봉산, 천아산, 항가산 등의 여러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상의 지형을 이루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평야부에 비해 쌀 생산량이 적어 부유하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산지 비율이 높아 쌀 생산력이 떨어지는 산내면에 비하면 가난하다고 말할 수 없는 지역인 것이다.
칠보는 정읍의 경주
15. “칠보면은 고적(古蹟)으로 유명”- 동방문학의 종유(宗儒)이던 태산현감 고운 최치원 선생의 영향을 받은 곳. 옛 대시산군과 태산현으로 이어지는 행정구역의 중심지. 칠보면은 태인군의 고현내면과 남촌일변면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칠보면은 태인면과 더불어 ‘태산 선비문화권’의 핵심을 이루는 지역이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치소가 있어 오랜 역사 속에 수많은 유물과 유적을 남겼기에 ‘정읍의 경주’라고 할 정도로 고적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산내, 산은 높고 골은 깊다
16. “산내면은 산고곡심(山高谷深) ”- 군내 경지면적 최소. 옛 태인군의 산내일변면과 산내이변면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산내면은 이름 그대로 첩첩산중에 있는 지역으로, 산고곡심(山高谷深)이란 산이 높고 골짜기는 깊다는 의미로 붙여진 별명이다. 또한 산내면은 산외면과의 경계선을 따라 섬진강 유역과 동진강 유역이 분수계를 이루는 곳이다. 요즘 정읍 시민들에게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곳이기에 더욱 소중한 지역으로 다가온다.
명당 그자체인 산외
17. “산외면은 산가수려(山佳水麗) – 가히 산중승구(山中勝區)라 할 만한 곳”. 풍수설에 의한 평사낙안(平沙落雁)형 명당(양택)이 있다하여, 원근으로부터 부호계급의 이출입(移出入)이 빈번한 곳. 산외면은 옛 태인군의 산외일변면과 산외이변면 지역을 병합하여 이루어짐.
[분석]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산외면은 그 자체로 커다란 명당이라고 한다. 그 중앙에 위치한 평사리는 평사낙안(기러기가 백사장에서 한가로이 쉬는 모습)형에서 생겨난 지명으로, 전국의 부호들이 탐을 낼 정도로 좋은 집터가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산외면은 산가수려(山佳水麗)라는 말처럼 산이 아름답고 물이 곱게 흐르는 곳이다. 산중에 빼어난 경치가 많아서인지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던 곳이다. 또한 이곳은 동진강이 발원하며 그 물줄기가 시작되는 지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