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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정읍이야기

천년의 영화(榮華)를 꿈꾸었던 돌기와집

천년의 영화(榮華)를 꿈꾸었던 돌기와집
산외면 화죽리 사가마을 여상 송씨댁과 평사리 외능마을 남양홍씨댁

 

박래철 ppuri1@eduhope.net

 

 

 

[산외면 화죽리 사가마을의 돌기와집]

 

 

 

 

 

[ 정량리 외능마을의 돌기와집 ]

 

일반적으로 전통가옥의 재료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지붕의 경우 볏짚, 억새, 기와, 나무기와(너와), 돌기와 등 다양한 지붕재료를 사용하였다. 물론 개인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선택의 폭은 다르겠지만 영구성으로 따져 천년을 간다는 돌기와가 고가(高價)의 재료였을 것이다.

정읍의 경우 산간부와 평야부가 골고루 섞여있기에 지붕재료도 다양한 편이지만  돌기와 지붕이 있다는 얘기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며칠 전 정읍에도 돌기와 지붕이 있다는 반가운 얘기를 지인(知人)으로부터 듣고 찾아갔다. 처음엔 반신반의(半信半疑)했지만 사실임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강원도 같은 깊은 오지(奧地)를 답사하면서 겨우 볼 수 있었던 흔치않은 풍경이었는데 우리고장 정읍에서 확인하게 되다니.......  내가 몰랐던 새로운 풍물을 대하고 나니 평소 좁다고만 생각했던 정읍이 일순간 넓게 느껴졌다.

산외 화죽리 사가마을 폐교된 화죽초등학교앞 돌기와집 

처음에 간 곳은 정읍시 산외면 화죽리 사가마을. 정읍시내에서 출발하면, 산외면 소재지를 지나 전주방면으로 가다가 만나는 마을이다. 마을 중심에 ‘네거리’가 있다하여 한자로 사가(四街)라고 하였는데,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폐교된 화죽초등학교가 나온다. 그리고 그 앞쪽 길 건너편에 홀로 있는 가옥 한 채가 돌기와집이다.

멀리서 봐도 지붕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정읍의 북동부 지역에 해당하며 북쪽방면에 상두산과 국사봉(김제, 완주, 정읍의 경계), 그리고 여기서 이어지는 독금산(獨金山) 등이 병풍처럼 감싸주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지형도를 찾아보니 독금산의 좌우측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이 집의 앞쪽에서 모아지고 이것이 도원천이 되어 동진강의 본류를 이루는 형국이다.

석양빛과 어우러진 돌기와 지붕 

돌기와를 얹고 있는 이곳 한옥 집은 오래되고 낡았으며 주인의 편리대로 조잡하게 개조된 모습이어서 옛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지만, 지붕의 돌기와만큼은 석양빛에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너른 텃밭에서 일하고 있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이 가옥은 약 60 여 년 전 송씨 할아버지가 건립하였으며 지금은 그 아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건물 소유주와는 친척관계라고 밝히는 아주머니는 3년 전 귀농하여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당시에 천석꾼소리를 듣던 부자 집으로 가운데 칸에 대청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일반 기와대신 천년을 간다는 점판암을 구해다가 돌기와를 올렸던 것이다. 아마도 이 건물은 구조상 바깥주인이 기거하는 사랑채에 해당했을 것으로 생각하며, 측면과 뒤편에 또 다른 건물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돌기와의 재료는 '천년을 간다는 점판암' 

이 집은 대략 서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한눈에 봐도 배산임수형의 좋은 집터로 여겨진다. 하지만 어인일인가?  당시 돌기와 지붕으로 호사스러움을 맘껏 자랑했을 부자 집이 이제는 그저 초췌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천년의 영화’를 꿈꾸었던 돌기와집이 100년도 안되어 사라질 위기인 것이다. 부속건물은 사라지고, 원형을 거의 잃어버린 사랑채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는데 이것마저도 언제 헐릴지 모르는 상황이고 보면 뭔가 특단의 보존대책이 시급히 필요한 것 같다. 돌기와집의 희귀성과 문화적 가치를 생각한다면.......

산외 정량리 외능마을 남양홍씨댁 지붕도 돌기와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여기서 가까운 산외면 정량리 외능마을. 산외면소재지에서 목욕리 쪽으로 우회전하여 가다가, 오른쪽 하천의 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만나는 마을이다. 마을의 가운데쯤 가장 좋은 자리에 홍씨 성을 가진 가족이 살고 있는데, 그곳에도 역시 흔치않은 돌기와지붕이 있었다.

가족이 기거하는 안채는 현재 양옥주택이지만, 과거에는 초가지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랑채 등 부속건물에 돌기와를 올렸었고, 그것이 현재까지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가옥의 지붕뿐만 아니라 돌담의 지붕에도 돌기와가 올려져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과연 이런 점판암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점판암을 운반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테고, 그것을 기와형태로 다듬어 지붕에 올리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인데.......

이번에 찾아본 돌기와집 외에도 정읍 곳곳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돌기와집이 더 존재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앞으로 돌기와 지붕과 관련된 분들을 만나 정읍의 돌기와집과 관련된 자세한 얘기를 더 듣고 싶다.

편리하고 쾌적한 현대적 주거환경에도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이... 

이제 돌기와집을 포함하여 전통가옥들이 우리 주변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양옥주택이나 아파트가 차지한다. 이제 현대인들은 기능적으로 편리한 주택에서 쾌적한 주거생활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허전하다. 적어도 근대화 이전에 태어나 전통가옥에서 성장하고, 지금은 현대적인 주택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세대들에게는 옛집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목마름처럼 남아 있다. 시골길을 지나면서 보게 되는 토담집이 우리 세대에게 그저 정겨움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앞에서 우리가 주목한 ‘돌기와’와 ‘돌기와집’에 대해 백과사전에서 더 자세히 알아본다.

돌기와는 점토질의 퇴적암이 변성되어 형성된 점판암을 판상으로 얇게 쪼개고 다시 적당한 크기로 잘라 지붕에 기와처럼 얹은 지붕재료이다.

돌기와집은 흔히 청석(靑石)집이라고도 하는데 기와나 너와 대신 납작하게 쪼개지는 점판암(粘板岩 : 점토질의 퇴적암이 변성된, slate)으로 지붕을 얹은 한국의 전통가옥이다. 석탄이 많이 나는 강원도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경기도 북부, 북한의 개성 일대, 충청북도 일부 지역에서 주로 지어졌는데,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납작한 점판암을 알맞은 크기로 잘라 기와 대신 지붕에 얹는데, 잘 미끄러지는 성질 때문에 청석을 얹을 때는 물매(지붕이나 비탈길 등의 기울어진 정도)를 아주 완만하게 처리한다. 청석을 얹는 방식은 기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즉 아래쪽에 청석을 얹고, 그 위에 아주 비스듬하게 다른 청석을 포개 얹는 식으로 계속 쌓아 올라간다. '천 년 능에'로 부를 만큼 한번 얹으면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기 때문에 매우 경제적이다. 점판암이 많이 나는 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재료 구입과 운반 등의 어려움으로 일부 계층에서만 청석으로 지붕을 올렸다. 지금은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 등에서만 볼 수 있다.

 

입력 : 2006년 09월 26일 23:02:56 / 수정 : 2007년 02월 18일 08:17:17

 

[ 더 하고픈 이야기 ]
최근 정량리 외능마을에 들렀다가 마을 노인들과 대화를 하면서 돌기와에 얽힌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 산외면 일대 마을에서 돌기와집이 생긴것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함께라고 합니다. 초가집을 헐어내고 인조슬레이트를 올리는 게 대세였지만, 몇몇 집에서는 완주군 화산면에서 공급되는 점판암을 구입하게 되었고 그곳 기술자들이 와서 돌기와를 올려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겨울에 내린 눈이 쌓이면 그 무게 때문에 돌기와가 밀리고 빗물이 새기도 하여 다시 돌기와 대신 슬레이트를 올린 집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보기보다는 실용성이 떨어진다고 불평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업체측에서 크기가 작은 불량품을 사용한 것 같다고 합니다.

위글의 제목처럼 천년의 영화를 꿈꾸었지만 부실공사로 인해 그게 얼마가지 못하였고, 지금까지 몇집 남은 것도 곧 사라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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