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해외답사)

일본 규슈 여행기

뿌리기픈 2007. 12. 9. 18:31

 

태어나서 처음으로 갔던 국외여행이었습니다.

줄포중학교에 근무하면서  1996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4박 5일간 직원여행을 다녀왔습니다다녀와서 나름대로 여행기도 써보고 필름으로 찍은 사진을 인화하여 폴더도 만들어보았습니다. ...............................................................................................................................

 

 


일본여행기 

     일시 : 1996.7.19 ~ 7.23(4박 5일간)

     일정 : 일본규슈 지방

             후쿠오카 →나가사키 → 구마모토 → 아소산→ 벳부 → 후쿠오카

     참가자 : 전북 부안군 줄포면 줄포중학교 교직원 16명 일동



첫째날(1996.7.19)


전주출발 (고속버스 터미널) : 07시30분(편도 부산까지 9600원 )

부산도착 : 11시30분경(부산시 온천동 소재 터미널)

동래구 온천동에서 명륜동 지하철역까지 택시로 이동.(1300원 )

지하철을 이용하여 부산국제항이 있는 중앙동까지 이동.

부산 국제항 주변 서라벌식당에서 점심 식사 (열무김치 비빔밥-3000원)

부산 국제항에서 수속을 마치는 시간이 길었음.

 부산에서 후쿠오카 또는 시모노세키까지 오가며 봇따리 장사를 하는 한국과 일본의 아주머니들이 아주 많이 보였음 (유난히 많은 한국산 라면 ,김상자)

배를 타기전 부산항에 있는 면세점(Duty Free)이용: 양주 시바스 리갈 17000원 , 하나로 담배 10갑 6000원 (시중가의 절반 정도라고 함)


부산 출발: 비틀2호(일본국적) 쾌속정 이용, 15시45분 (2시간55분 소요)

부산항을 벗어나기 전 돌발사고 발생: 배의 밑부분 스크류에 밧줄 쓰레기가 걸려 항구로 다시 귀항함. 정비후 다시 출발 .1시간가량 지연됨 _ 이것때문에 첫번째 숙박 예정지인 나가사키 유스호스텔이 취소됨.(일본쪽의 일방적인 결정에 이해가 안되기도 함.)

아뭏튼 우리나라 부산 앞바다에 널려 있는 바다 쓰레기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군다나 일본선적의 쾌속정이어서 일본 승무원들에게 창피한 느낌도 들었다.

배안의 지정석에서 TV시청-일본 스모(씨름)경기관람. 일기예보를 보니 후쿠오카의 내일기온:  31。C ~ 26。C

배에서 본 쓰시마섬(대마도)에 대한 인상: 구릉성 산지가 대부분. 일본 왜구들의 근거지였던 곳 . 고지도상에 우리나라 영토로 기록된 곳. 구한말 최익현 선생을 비롯 의병들이 붙잡혀 옥고를 치루던 곳.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후쿠오카 하카다항 도착시간 :19시35분.

 20시경 항구에서 하카다 역까지 가는 셔틀버스 승차 , 20시 15분 하카다역에 도착. 하카다역에서 - Rail Pass승차권을 부산에서 발급받지 못한 것으로 착각 , 일단 나가사키 행 기차를 포기하고 주변 Green Hotel로 숙박 결정 (1인당 4만원 정도)여권과 승차권을 담당했던 나로선 가이드였던 교감 선생님으로부터 정확한 설명을 받지 못했기에 설마 내 베낭속에 승차권이 있으리라곤 생각을 못했음.(다음날 아침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

이 과정에서 우리 일행은 굉장한 당혹감과 낭패감으로 우왕좌왕했음. 안내책임자인 교감 선생님의 심정은 더 어려웠겠지만 .....

이때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지켜보던 일본 공무원 두사람(배에서 동행했던 분들 )이 밤늦게까지 우리를 돕기위해 노력해준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서로 의사소통이 잘 안되어 답답하기도 했지만 이런 것이 민간외교이며 일본의 잠재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승차권은 배와 기차를 연결해 놓은 것 (bording pass+rail pass)-한국 관광객을 위해 저렴한 가격으로 할인을 해준다고 한다.

*사이더 1병(1.8리터):300¥- 당시 엔화는 우리원화의 약7.5배


너무 시간이 늦어 저녁식사를 각조별(모두4개조 편성)로 간단히 해결하기로 결정함. 우리조는 가까운 24시간 편의점을 이용하기로 함. 한국의 편의점보다는 물건이 더욱 다양하였다.  우리는 도시락(밥)과 김치,오뎅국물까지 구입하여 호텔방에 돌아와 식사를 해결함.김치는 한국김치를 구입했음. 역시 예상했던대로 물건값은 무척이나 비싼 편이었다. 여행기간 내내 선생님들이 애를 먹고 적응을 못한 게 바로 식사 문제였다. 음식맛이 우리와는 달랐던 것이다. 단맛,짠맛,신맛이 주된 맛이어서 우리의 맵고 짠 음식과는 아주 달랐다. 개인적으로는 워낙 먹성이 좋고 비위가 강했기 때문에 그런대로 먹을 수는 있었다. 이것도 큰 장점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로마에 가서는 로마식대로 하라는 말처럼... 여행을 하면서 그나라 음식에 적응을 해야지, 못먹겠다고 버티면 결국 자기만 손해라고 생각된다. 나아가 여행에 필요한 체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음식의 가장 큰 특징은 단맛,신맛도 강하지만 맛 이전에 화려한 색상과 손길이 많이가는 조리형태, 그리고  무엇보다 음식의 양이 적다는 점이다. 이른바 소식(小食)이어서 나로선 배가 고플 정도였다. 음식재료에 바다생선과 해초류를 많이 쓴다는 사실,장아찌 종류가 많다는 것, 색소를많이 쓴다는 것. 어쨌든 적게 먹는 일본 식사습관이 일본을 세계 최고의 장수 국가로 만드는 가장 주된 비결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후쿠오카 거리풍경: 세련된 도시라는 첫인상.여기서 시모노세키까지 해저터널이 놓여 있고 ,유명한 신깐센(신간선)철도와 연결됨.일본 규슈지방 어딜가나 깨끗한 거리 풍경이 인상적이고 ,그만큼 갈고 닦은 인간의 세심한 손길이 느껴지는 곳이다. 예외적으로 역주변엔 거지로 보이는 사람들이 구석에 앉아 있었다.

지하스넥 코너(식당)에는 음식차림표 대신 시각적으로 손님을 끌기위해 식당 앞쪽에다 유리관안에 음식을 파라핀으로 영구처리해서 전시해놓고 있었다. 물론 가격도 표시해 놓고 있어 외국인들도 언제든지 고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런 것도 일본인들의 세심한 배려 내지는 고도의 상술이 아닌가 생각된다. 

 역시 셔틀버스에서 본 것 중 인상적인 것은 버스 좌석의 앞쪽 마다 비닐봉지를 예쁘게 걸어놓아 언제든 손님들이 이용할 수 있게끔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이다.

버스 승차는 좌측에서 이루어지고 통행도 우리와 정반대로 차량은 좌측,사람은 우측통행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처음엔 적응하기가 어려웠다.인상적인 것은 횡단 보도에 자전거 횡단 표시까지 있고 거리 보도 마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표식과 소리를 이용한 신호등이 있었다.

호텔안에는 음료수로 녹차가 준비됨. 잠옷은 일본 전통의상.화장실은 조립식 플라스틱 재료.

TV 채널은 9가지.-들은 이야기지만 이 중에서 1개의 채널은 성인용 포르노를 보여주는데 다음날 카운터에서 대가를 지불하면 된다고 한다.

하카다역 주변에서는 저녁이 되니깐 전봇대 기둥마다 매춘 광고 포스터가 붙고 심지어 개인 명함까지 붙어 있었다. 性적으로 상당히 개방된 사회임을 알 수 있었다. 대중잡지까지도 전라(全裸)의 여자 모델이 등장한다.


둘째날(1996.7.20)

아침식사 800¥ -식사에 날계란도 있었음.일본인은 계란을 많이 소비한다고 한다.

하카다역 출발(10시 50분경)

나가사키역 도착(13시 06분):가는 도중 평야와 취락,바닷가를 구경.규슈지방은 기본 교통수단이 기차인듯함. 달리는 기차속에서 한 일본인과 대화 시도. 알고보니 그 사람의 직업은 일본자위대 중위 계급이었다. 왜소한 체격에 사복을 입고 있으니 전혀 군인 같지 않았다. 난 일본어를 못하고 그 쪽에서도 영어조차도 잘 모르니 한자를 사용하여 겨우 겨우 의사소통을 해보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 2병중 1병을 꺼내 선물로 주니 곧바로 그 군인은 기차내에서 기념 열쇠 고리를 사서 주었다. 빚지고는 못사는 사람들 같았다.

*열차내 물건가격: 맥주캔-250¥,오렌지캔-180¥

열차 승무원 중 수레를 밀고 다니며 물건을 파는 아가씨의 미모정도로 그 기차의 등급이 판명된다고 한다. 객차 칸마다  들어오고 나가면 꼬박꼬박 미소짓는 얼굴로 인사를 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손님의 기분을 좋게하는 인사 서비스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것이 비록 가식적이든 ,진심이든간에 ....

나가사키역에서 평화공원 (원폭투하지점)까지 택시비 1030¥ .


일본의 택시기사는 대부분 40대내지 50대 노인들(?).간이 영수증 발급기로 뽑아주는   영수증은 느낌이 달랐다. 일본은 모든 상거래에 있어 완벽한 투명성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출입문 마다 자동문이고 ,에스컬레이터도 절전을 위해 센서로 사람을 감지하여 사람이 올 때만 작동되었다. 화장실 (水洗所 라고 함)에 수도시설도 센서장치가 되어있다. 공공장소마다 화장실이 매우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나가사키(長崎)평화공원안에는 원폭 때문에 죽은 영혼을 달래는 기념조형물이 우람하게 서있었다. 그 옆에는 천마리의 학을 접어 모셔놓은 집도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면 기념관도 있었다. 그곳엔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물과 영상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이곳의 사망자수는  당시 히로시마에서 죽은 사람보다는 적었지만 원폭으로 인한 피해는 대단했다고 한다.


 이제 나가사키역을 출발(15:00)→ 鳥栖(16:37)에 도착, 여기서 기차를 갈아타고 다시 구마모토로 향함.

鳥栖 (16:41)→ 구마모토(熊本) (17:35)


 지나가는 열차안에서 바라본 일본농촌의 풍경은 무척 평화롭고 조용했다. 특히 수로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고,집집마다 텃밭에  온갖 농작물과 화초를 기르고 있었다. 농로는 모두 콘크리트나 아스팔트 포장도로이고 승용차가 지나갈 정도의 넓이였다. 개인 승용차는 집집마다 있는 주차장에 질서있게 주차되어 있었다.

주택은 대부분 맞배지붕 형식의 2층 목조 기와집(간혹 초가집도 있었음)이었고 특히 지붕의 기울기가 심했다. 이것은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강수량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농경지에는 일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대신 간혹 허수아비가 보였음.

나가사키에서 구마모토로 가는도중, 오른편에 유명한 운젠화산이 연기를 뿜고 있어 이곳이 화산섬이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그리고 하얀 백사장이 펼쳐져 있는 해변엔 수영장도 보였는데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 한가롭게만 보였다.이걸 보는 순간 역시 일본은 우리보다 부자 나라구나라는 부러움과 함께 우리나라 해수욕장의 일반적인 모습과 비교가 되었다. 우리는 휴가철이 여름철에 집중되는 탓에 전국 어딜가나 넘쳐나는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만 받고오곤 하지 않는가.....

잔잔한 바닷가 물의 색깔은 제주도에서 처음보고 반했던 옥색(청록색)이었다.

동네어귀엔 한결같이 집옆에 까만색의 돌로만든 기념비석이 빼곡히 들어선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말하자면 산자와 죽은자의 거리가 우리보다 가깝다고 표현하고 싶다.  정말로 산에는 눈을 �고 보아도 묘지가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메이지 유신이후 국가 시책으로 화장을 장려했고 이를 국민들이 따라주었다고 한다. 전체주의적인 특성을 지닌 일본인들의 국민성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좁은국토를 지닌 우리나라도 일본의 묘지정책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겠고,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국민들 각자가 지금까지 오랜 유교적 인습에서 지켜왔던 매장 풍습대신 화장을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가사키나 구마모토같은 중소도시엔 지상으로 전철이 지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우리나라엔 1960년대말 사라졌지만.....전철은 매연이 없기 때문에  도심의 공기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한 환경정책에서 비롯된 것 같다.전기사용량은 선진국의 척도라는 말이 있듯이  일본은 전철외에도 전기를 다방면에 사용하고 있었다.


* 주유소:Auto Oasis 라고 표기함

* 세계 도자기 박람회가 열린 나가사키 -----염(焱)-ceramic 은 도자기라는 뜻.

* 일본의 최근 유행사업은 pachinko (빠찡꼬)

* 일본열차 - 지정석 / 자유석 으로 구분.


도심을 제외한 주택가 길거리에 사람이 붐비지 않는 이유(퇴근시간이후나 휴일에도 마찬가지)가 참으로 궁금해서 알아보았는데 결론은 개인주의적이고 가정적인 사회분위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집가까운 곳에  공원과  놀이시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컴퓨터에 몰두하여 집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고 ,어른들은 집안일 특히 집안에 빽빽히 심어져 있는 나무와 화초들을 관리하느라 한가하게 놀거나 외출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일본의 주택가엔 수령이 오래된 나무가 집안가득히 있어 집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밖에서는 모를 지경이다. 평소 식물(나무와 화초)기르기를 좋아하는 심성 때문에 조경과 분재같은 분야가 발달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구마모토에서 택시를 타고 유스호스텔까지 이동(1190¥)


일본 어딜가나 여름의 더위를 극복할 수 있는 에어컨 시설이 실내공간마다 설치되어 있어 직장인들이 여름에도 정장차림을 할 수 있었고 어느 출입문에나 자동센서가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 부럽게 느껴졌다.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는 구마모토 시립 유스호스텔 도착(18:00)

1인당 1박 2끼 식사에 2800¥씩 계산됨.


 이곳은 도시 변두리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어 무척이나 조용했다. 市立이어서 그런지 건물이 낡고 보수가 잘 안된게 흠이었다. 화장실이나 침실 구석구석마다 사람의 손길이 정성스럽게 배어 있었다. 특히 화장실내 세면장에는 물이 튀는 것을 감안하여 수건을 깔아놓은 것에 감동하였다. 다만 침실은  2층 침대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통풍이 잘 안되어서 그런지 곰팡이 냄새가 심하게 났지만 그런대로 지낼만 하였다.하지만 교장선생님은 불평이 대단하였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주변 주택가를 산책삼아 둘러 보았다.몹시도 깨끗하고 조용했다. 집집구석마다 주인의 손길이 닿아 있었고 모든 공간마다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 나무는 또한 잘 다듬어져 있었다. 이런 나무를 다듬는 일로 휴일을 보내는 사람도 많을 것 같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원사에게 맡기기도 하겠지만 ....

또 한가지 인상적인 것은 우리나라 같으면 길거리에 자동차들이 무질서하게 주차되어 있을텐데 여기는 정해진 공용 또는개인 주차장에만 차들이 있고 길거리에 나와 있는 차를 볼 수가 없었다.그러기 때문에 시내버스가 골목 구석구석까지 들어갈 수 있고 시민들은 자기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내릴 수 있는 편리함을 누릴 수 있다. 또한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 이용이 보편화되어 특별한 일이 아니면 우리처럼 승용차를 자주 이용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딜가나 교통법규가 잘 지켜지는 걸 보면 이들의 준법정신도 강하겠지만 정부의 의지와 벌금도 한몫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일행은 해가 질 때까지 주택가 구경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동네 공회소 (마을 회관),주점 그리고 하수도 시설의 깨끗함 등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동네에 흐르던 조그만 개천에 대한 그리움 같은게 느껴졌다. 하수도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일부러 복개공사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그속엔 조그만 고기들이 노닐고 있었다.아마도 각 가정에서부터 하수도물을 자체 정화시킨 후 내보내는 것 같다.

 저녁엔 같은 숙소를 이용했던 일본인 한남자(30대 후반으로 보임)와 우리방에서 젊은 우리들과 한.일간의 문화를 비교해가며 대토론회(?)를 밤늦게까지 가졌다. 비록 대화가 매끄럽지 못했지만 만국의 공통어인 바디 랭귀지를 이용하여 의사소통을 하였다.서투른 한자와 영어를 써가며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인사 소개도 하고 여러 가지 의문사항을 물어보고 마지막엔 월드컵 공동개최에 대한 생각까지도 서로 아야기 하게 되었다. 개인사업을 한다는 이 일본인은 바쁜 가운데서도 가끔씩 어릴 때 추억을 생각하며 이런 유스 호스텔을 이용한다고 했다. 매우 낭만적인 사람같았다. 일본인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사람도 무척이나 친절하고 인상이 좋았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양국의 우의(友誼)를 다지며  숙소앞에서 기념촬영도 하였다. 


세쨋날 (1996.7.21)

 아침 숙소를 떠나 우리는 버스를 이용하여 구마모토시내에 도착하였다. 시내에서 가까운 구마모토성까지 10여분을 걸어가게 되었다. 이 곳에도 역시 지상 전차가 이용되었고 시내는 깨끗한 현대식  고층건물이 많았다. 거리엔 장애자용 편의시설도 많았다. 인도에 표시된 맹인용 돌출 보도블럭,횡단보도에 신호등과 더불어 새울음소리로 구분되는 장애자용 시설,버스에 설치된 휠체어 승강기 등등 이 모든게 우리로선 감동으로 다가왔다.


구마모토 성(城)에 도착 , 잠시 기다렸다가 입장함. 우리가 가장 먼저 입장하게 됨. 이 곳은 과거 임진왜란시 주역중의 한사람인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영지임. 나중에 호소카와 집안에서 계승했다고 함.이 곳은 19세기 후반 이른바 西南전쟁(일본내전)의 치열한 전투장소이기도 함.지금은 이 성과 시민들의 휴식처인 공원과 문화시설(박물관,미술관,식물원 등)로 단장되어 있었다.

 이 성(城)은  바위를 정교하게 다듬어 만들었는데 그 규모가 우리나라것보다 웅장하였고 위압적이었다. 교감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임진왜란 직후 조선인 포로들을 노예처럼 이용하여 이 성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의 한과 서러움이 돌마다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가장 큰 성내 건물인 천수각 정상(전망대)에 올라 구마모토 시내를 둘러 보았고 여러 가지 전시물도 보게 되었다. 천수각에서 내려온 후 기념촬영을 도중 홍콩관광객들도 만나게 되었다.

 일본 규슈지방을 돌아다니며 내내 확인한 재미있는 사실중의 하나는 공공장소에서 일본인은 거의 한여름에도 정장차림을 고집하는데 우리를 포함한 외국 관광객들만 간편한 반바지 차림이라는 것이다. 성(性)적으로는 우리보다 개방되어 있으면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직도 체면 문화를 바탕으로한 보수성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

 

주변 식물원 관람 - 분재와 열대성 수목

현대 미술관 관람 - 르노와르의 가슴에 꽃을 장식한 여인 작품 감상(1억 8천¥에 구입했다고함) .그외에 서양의 쟁쟁한 미술가들의 작품이 즐비하였다.(마티스,피카소,칸딘스키,고야 등)----- 일본인들의 경제력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박물관 관람 - 이 곳에는 옛것과 현대과학이 동시에 전시되어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박물관에 어린이들이 많이 찾아 왔는데 그건 과학실험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기수로 유명한 제임스 와트가 만들었다는 당시의 증기기관 기계가 한 대 있었다. (현재 세계에 2대밖에  없다고 함.) 한 코너에서는 화석(化石) 전시회도 있었다.

구마모토 박물관 앞에서 역까지 택시 이용: 950¥ 지불

역내 식당코너에서 조별 식사 :730¥× 3명 〓 2190¥

                             570¥× 1명 〓  570¥

 이곳 식당은 외국인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앞에는 쇼윈도처럼 유리로 덮힌 전시칸이 있고 거기엔 이 식당에서 파는 다양한 음식들이 밀랍처리 되어 있었다. 그리고 종업원들이나 주방 아주머니들이나 모두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정갈한 일본인들의 모습이었다. 음식의 양이나 맛은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청결함이나 친절함이 그것을 보충하고도 남았다. 역주변이어서 그런지 점심 손님들로 무척 붐볐다.


구마모토역에서 13:05 출발

2시간 정도걸려 아소역에 도착 (구마모토현에 해당함).눈앞에 펼쳐진 아소산은 세계최대의 칼데라(화산폭발시 함몰로 생긴 지형, 백두산 천지도 여기에 해당함)이며 활화산이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병풍처럼 둘러처진 외륜산의 장관이 눈길을 끌었다. 지리나 지구과학 전공이 아닌 사람은 느낌이 별로였겠지만 나는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활화산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 몹시도 흥분이 되었다. 그야말로 여행의 클라이맥스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휴화산인 제주도를 처음보고 느꼈던 감흥과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이런때 같은 지리전공자들끼리 왔더라면 할 말도 더욱 많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가지면서 .....

 이곳 아소고원에는 논이 펼쳐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현무암 토양은 보습력(保濕力)이 약해 농사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곳은 오랜동안  현무암의 토양화가  진전된 곳이라 논농사가 가능하지않았나 추측된다.   

 구마모토의 낮은 땅에서 아소의 높은 고원으로 올라가는 도중 유역변경식 수력 발전소를 보았고, 우리가 타고갔던 기차가 스위치백(switch back)식으로 급경사를 극복하며 올라가는 색다른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아소고원 안에 있는 아소역에서 내려 우리는 셔틀버스를 타고 아소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아소역을 중심으로 외륜산이 보이고 이곳은 세계 최대의 칼데라라고 하는데 직경이 무려 20 ~ 30Km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분지상 고원으로 보였다.


아소역에서 같이 내린 한국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중 일부 여학생들은 학생답지 않게 화장을 진하게 하고 짧은 바지를 입은 모습이 정말 꼴불견으로 보였다. 모름지기 학생들의 해외 여행이라면 그저 희희낙락하며 즐기기보다는 세계를 배우려는 보다 진지한 눈빛이  필요할텐데 ,아마 이들은 단지 부모 잘 만나 여름방학동안 이런 곳까지 즐기러 다니는 낭비족(?)들 같았다. 그래서 나는 솔직이 반가운 마음조차도 들지 않았다.

  마침 아소역을 나오면서 나무 기둥을 클레인으로 들어 올려 조립식 주택을 짓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지진 때문에 나무를 주재료로 쓴다는 것이었다. 건물벽은 과거엔 주로 목조였는데 지금은 콘크리트를 많이 쓴다고 한다. 하지만 지붕만은 전통을 고수하여 기와집 형태가 일반적이고 지붕이 높은 맞배지붕이 일반적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이곳이 아열대성 기후이기 때문에 시원한 실내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인 것 같았다.


아소산 정상을 오르면서 논,밭 주변엔 삼나무를 방풍림(여기는 태풍의 길목이기 때문에 )으로 심어 놓았고 이 곳 규슈에서 가장 흔한 나무인 것 같았다. 산에는 완전한 인공조림의 아름다움이 돋보였고 정상쪽에는 고도상 나무가 클 수 없어 초지가 조성되어 있는데,군데군데 목장엔 누렁소들이 한가로이 누워 있었다. 참고로 일본엔 대체로 대나무 종류가 많다고하는데 이건 지진에 제일 강한 식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소역에서 아소서(西)역이라 불리는 정상부분의 아소산관광안내소까지 버스를 이용함.(1인당 610¥지불) .여기서부터  최종 목적지점인 중악(中岳)분화구까지 30분정도 걸어서 올라감. 일반적으로 정상까지 가는 방법은 3가지 -도보,승용차,케이블카.  도중에 화산폭발에 대비한 방공호 비슷한 벙커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 정상 주변엔 수많은 분화구와 기생화산들이 있었다. 용암이 흘러내린 자국도 선명하게 보였다. 분화구 정상에는 화산재가 쌓여 있었고 퇴적암 노두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그아래엔  유황이 끓어오르면서 수증기가 솟아 오르고 있어 장관을 이루었다. 이곳에서 노점상들은 유황가루를 팔고 있었고 난 수업 자료로 쓰고자 100¥을 주고 1봉지를 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아소역을 출발 ,2시간 정도걸려 오이타현 벳부역에 도착함.오는 도중 우리는 이국적인 산악 풍경을 보며 규슈의 내륙지방을 관통하는 기차여행의 재미를 한껏 즐겼다. 이 곳 규슈지방엔 산이 많아서인지 대중교통수단이 도로보다는 철도인 것 같다. (전기가 풍부하다는 점과 환경 친화적인 교통 정책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역전 도시락집을 찾아 김밥을 준비하였고 택시를 이용 밤늦게 벳부 유스호스텔에 도착함.( 저녁 7시 35분 )

 김밥이 입맛에 안맞아 그냥 도중에 포기하는 분들이 많았다. 도시락값(710¥)

이곳 벳부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온천 도시이기 때문에 어딜 가나 온천욕을 쉽게 즐길 수가 있다. 우리가 이용한 유스호스텔에서는 온천이용을 밤10시까지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밤늦게 집으로 국제전화함. (깨끗한 음성을 느낄 수 있었음)


넷째날(1996.7.22)

아침 8시경 숙소를 출발 도보로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이동함. 가는 도중 무궁화꽃앞에서 기념촬영. 정류장에서 교복을 입은 여고생을 만나 친절한 안내를 받았고 결국 이 여학생이 다니는 학교를 나중에 방문하기로 함. 사전연락도 없이 방문하는 것이 결례인줄 알면서도 ....

 벳부 온천지대엔 온통 수증기 열기로 가득했다. 겨울에도 보일러가 필요없을 것 같다.

먼저 우리는 버스를 타고 지옥순례 관광지까지 이동함. 이동 중 시내버스 속에서 안내방송이 한국어를 포함 3개 국어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 지옥 순례지: 벳부 시내 곳곳에서 발견되는 간헐천에 갖가지 시설과 볼거리 (악어,동물원,식물원 등)를 갖추어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음.

주변상가에서는 고구마,옥수수 ,달걀등을 쪄서 팔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 옛날  시골장터 같은 느낌을 받았음.

 지옥순례지에서 하마루 고등학교까지 40분정도 걸어서 이동함.


학교방문: 교장실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선풍기 몇대에 의존하는 교무실,그리고 이것마저도 없는 교실의 분위기가 대조적이다. 교실에 냉방시설이 없는 건 아마 학생들에게 인내심을 길러주기위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곳은 인문계 고등학교이기에 입시 위주의 교육이 금방 피부로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우리 나라보다 시설이 나았다. 가는 날이 마침 여름방학 직전 종업식날이었다. 가장 부러웠던 건 교과별로 연구실과 강의실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남녀공학에 교복을 입었는데 남학생 두발은 통제가 적은 탓인지 장발이 의외로 많았다.  그리고 학생들은 우리나라 학생들보다 훨씬더 영어를 일상생활에 사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대로 가다간 일본인들은 일본어와 영어를 혼용해서 사용하는게 보편화될 것 같고 영어도 공용어로 지정될 것 같기도 하다. (?)  이건 아마도 근대화의 시기가 우리보다 앞선 역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있고 한편으론 서구지향적인 그들의 가치관에서 나온 결과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아무튼 친절하게 맞아준 이 학교 교직원들 그리고 학생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교사로서 더 알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주마간산(走馬看山)식의 방문에 만족해야만 했다.

* 하마루 고등학교(벳부시립):남녀공학, 한학년에 6개 반(이곳에선 조(組)라고 함),한 반에    40명씩 배정, 격주로 5일제 수업함.교사는 1주일에 18내지 20시간이 평균 이수 시간, 60세 정년.


벳부역 근처에서 점심해결.( 우동- 600¥)


벳부(別府)역 출발(13:15) → 하카다역 도착 (15:16)

 규슈섬의 북반부를 지나며 말로만 듣던 키타 규슈(북구주)의 공업지대를  차창밖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번에 탄 열차는 sonic이라는 민간회사가 운영하는 열차였는데 지금까지 이용한 것 중에서 가장 화려한 것이었다. 마치 공상과학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에서 나오는 첨단모델의 열차였던 것이다.참고로 일본의 기차는 국가운영의 이른바 국철과 수많은  민간운영의 철도로 나뉘어져 있어 자연스럽게 경쟁을 하면서 승객들에대한 서비스가 개선된다고한다. 열차요금이 만만치 않아 자기 생활수준에 맞는 등급의 열차를 골라 탄다고 한다.

우리는 외국 관광객으로서 특혜를 받아 아무때나 열차등급에 관계없이 아무거나 골라 탈 수가 있었다. 이것은 더 많은 외국 관광객을 끌어들여 관광수입을 올리기 위한 정책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후쿠오카 시  하카다역 근처 Hokke club 호텔에 투숙 (1인당 6000¥정도)

남은 시간에 우리는 Best 전자상가 (텐진 거리)쇼핑 - 이동시 택시비 900¥

이곳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 오기 때문에 한국인 점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근처 한국관 (한국음식 전문점이지만 경영은 일본인이 하고있음)에서 저녁식사를 함.굉장히 비싼 음식점.심지어 추가로 먹게 되는 김치까지도 계산됨. *된장찌개- 1인당 780¥ 옆좌석에선 일본인들이 한국식 불고기를 즐기고 있었음.아마도 이곳은 부유층들이 출입하는 것 같다.

* 택시의 기본요금 : 550¥

* 연호 사용: 平成 (아끼히토)천황


다섯째날 (1996.7.23)


 호텔에서 편안한 밤을 보내고 (2인 1실 침대 ) 아침식사는 뷔페식으로 함.

아침 8시 45분 숙소를 출발 ,도보로 하카다역까지 이동함 . 우리는 시간적여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하카다항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배표시간이 잘못됐음을 알고 부랴부랴 소란을 떨며 각자 택시에 분승 조별로 출발했지만 배는 이미 떠나버린 뒤였다. 우리조는 택시기사의 실수였는지 설상가상으로 하까다항구가 아닌 하까다 공항까지 같다오며 해프닝을 연출했다. (이 과정에서 교장선생님의 흥분된 고성(高聲)이 많은 일본인들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하였다.) 너무급히 서두르다보니 의사소통까지 잘 안되었던 것이다. 영어선생님들의 영어실력도 이곳에선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드물어 사용할 기회가 적었다. 특히 택시기사들의 연령이 많아서인지 영어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우리는 별 수 없이 오후 3시 45분발 배편을 지루하지만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부산에 도착한 것은 오후7시경 ,부산에 도착하니 일본의 깨끗한 공공시설과 우리의 그것이 머릿속에서 계속 교차되었다.우리는 첫날 식사를 했던 서라벌 식당에 가서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만끽할 수가 있었고 역시 우리몸엔 우리것이 최고야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식사후 렌트카(승합차)를 빌려 전주 ,정읍으로 향했다. 승합차에 몸을 기대고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한국의 밤 풍경을 바라보며 4박 5일간의 여정에서 느낀 점들을 마음속으로 조용히 정리하였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면서 살아간다고 한다 .그 속에서 발전도 가능하리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생각해 본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공부할 수 있었다. 나같은 사회선생님들에겐 참으로 절실한 게 이런 해외연수인 것이다. 일본을 여행하면서 우리보다 앞선 경제력을 보고 때로는 한없이 부럽기도 하고 투철한 질서의식은 우리가 배워야할 점이라고  힘주어 말하고도 싶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앞으로  한.일 문제에 있어 감정적 접근보다는 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태도가 필요하리라는 점과 이를 위해 한. 일 양국의 젊은이들이 더 많은 교류가 이루어져야겠다는 생각이다.


이번 여행이 이루어지기까지 가장 애써주신 강영일 교감선생님에게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기회가 되면 중국여행도 기대를 해본다. 拙稿지만 나름대로 정리해보았다.

-박래철 씀.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 성

 

 일본 규슈의 뱃부 온천(노천탕)

일본 규슈의 나가사키 평화공원의 동상(원폭투하 지점)

 

 일본 규슈 후쿠오카항

 

 일본 규슈의 활화산, 아소산

 

일본여행기(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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