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해외답사)

베트남 여행기

뿌리기픈 2008. 10. 30. 01:18
 

나의 두번째 국외여행, 2001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정읍여자중학교 직원들과 함께 4박 5일간 다녀온 베트남 여행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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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여행기

 

 

 

 

 

 

 

  

2001년 7월 19일

저녁 8시, 우리는 드디어  인천 공항을 이룩하게 되었다. 초저녁이라 주변이 어슴푸레 보이고 아시아나 항공기가 활주로를 시원하게 달려 순식간에 하늘을 날았다.  드디어 베트남 다낭 상공을 거쳐 목적지 호치민시(Ho Chiminh city-구 사이공시)의 떤선�(TAN SON NHAT)공항에 도착하였다. 소요시간은 약 5시간 정도(한국출발- 저녁8시, 베트남 도착 -한국시간으로 새벽1시, 베트남 현지시간으로 저녁11시)였다. 베트남은 경도 상으로 우리나라보다 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시차는 우리나라가 2시간 정도 빠르며 비행기안에서 시계를 조정하였다. 비행기를 내리기 전 모니터에 나온 호치민시의 기온은 28도(열대야)였고 맑은 날씨라고 한다. 캄캄한 밤에 고도를 낮추며 내리는 비행기에서 바라본 호치민시의 야경은 대단히 아름다웠다.

 

밤 11시 20분, 간단한 입국수속을 거치는데 신분증을 확인하는 출입국 업무 담당 공무원들은 모두 군복을 입고 있어 이 곳이 바로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을 실감하였다.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 근무요원들을 지나서 공항 출구에 들어서니 ‘아오자이’(장옷이라는 베트남 전통 여성복)를 입은 베트남 여성이 우리들을 미소로써 맞이하고 있어 앞에서 가졌던 딱딱한 느낌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아무리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외국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데는 친절한 서비스와 밝은 미소가 최고일 것이다. 공항을 나오는데 생각보다 밤은 시원하였고 어떤 베트남인은 긴 팔의 점퍼를 입을 정도로 열대지방 사람들은 추위를 더 쉽게 느끼는 것 같았다. 공항 앞의 풍경은 마중 나온 사람들로 북적대었고 우리는 11시 45분경 현지 여행사에서 준비한 소형 관광버스에 올라탔고 현지 한국인(이정욱씨)의 안내로 베트남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버스에는 운전사 외에 보조 운전사가 있어 이채로웠는데 이런 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바로 일자리를 늘려 완전고용을 하려는 국가적인 정책인 것 같았다. 우리네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구조조정 감이겠지만 시장의 원리가 아닌 인간을 우선 배려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한편 1975년 남북 베트남의 통일이후 이곳 남부 베트남에도 사회주의 체제가 도입되었지만 최근 경제개혁을 위해 사유재산 제도를 인정하고 외형상 거의 자본주의 국가를 닮아가고 있었다. 흔히 공산주의(사회주의 포함)국가라고 하면 우리는 괜히 ‘레드 콤플렉스’ 같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그건 우리가 분단국가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고 적어도 이곳 베트남에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의 분위기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중국식의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공산국가 베트남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었고 실제로 이곳에서 평등의 가치보다는 자유와 경쟁을 통해 사회가 발전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갈수록 빈부격차도 심해지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현재 이곳 호치민시에는 약 8000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고 우리나라 상품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1992년 수교이후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통일 이전보다 더욱 긴밀한 관계로 발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밤 11시 50분경 우리는 Novotel Garden Plaza Saigon Hotel 의 9층에 투숙하게 되었다. 최상급 호텔은 아니지만  Semi Deluxe 급의 호텔이라 하는데 완벽한 서양식 호텔로서 □자형 건물구조에 안쪽에는 수영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호텔안쪽 수영장

 

7월 20일

여행 둘째 날의 아침이 밝았다.  아침 6시경,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커튼을 열고 시내 풍경을 바라보니 이른 아침인데도 러시아워라고 할 정도로 호치민의 시민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시내 중심지의 일터로 향하는 교통수단(오토바이, 자전거,  자동차 순으로 많음)에서 나오는 소음과 매연이 대단하였다. 열대지방에서는 비교적 시원한 아침과 저녁시간이 더욱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다. 가장 많은 교통수단은 역시 오토바이인데 가족 단위로 타고 가는 경우가 많았고 운전자의 운전솜씨나 동승자의 탑승기술이 모두 뛰어난 것 같다. 심지어 어린아이도 부모의 품에서 아주 편안한 자세로 잠을 자면서 가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오토바이와 자전거 이용자들은 보자기를 안면에 두른 채 달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도시의 매연을 피하기 위해 그런 것 같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햇빛에 얼굴과 피부가 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고 하였다. 특히 젊은 여자들은 눈만 내놓은 채 거의 모든 피부를 가릴 수 있도록 긴팔옷이나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곳에서 미인의 조건은 하얀 피부와 계란형의 얼굴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베트남인들은 원래 체질적으로 뚱뚱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날씬하기도 하지만 그런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식사를 소량으로 자주 먹는다고도 한다.

 

 

                              호치민 호텔 주변 아침풍경- 집집마다 집앞을 청소하고 있다.

 

                           전쟁기념관을 둘러보고면서....

 

룸메이트인 박경우 선생님과 함께 아침 식사 전 호텔 주변을 산책하기로 하였다. 북적거리는 아침 시간, 도로 주변엔 간단한 쌀 국수나 밥을 파는 노점 음식점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손님들로 가득하였다. 우리 눈에는 다소 비위생적으로 보이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시민들이 이런 곳에서 아침식사를 때운다고 한다. 이 나라 사람들은 집에서 식사하기보다는 외식이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가정 주부들에게는 식사 준비에 대한 부담이 적을 것 같았다. 그만큼 여성의 권위가 강하기도 하고 음식값이 저렴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도 할 수 있다.

아침 7시, 우리는 호텔 식당에서 한화로 1만원 정도의 뷔페식 아침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관광버스를 타게 되었다. 호텔 내부에서는 에어컨 시설로 인해 몰랐으나 차를 타기 위해 호텔 밖으로 나와보니 아침부터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이곳의 기후는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계절풍 열대기후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은 우기에 해당되므로 높은 기온과 습도가 합쳐져 불쾌지수가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한여름 날씨와 비슷한 것 같았다.

8시 30분, 관광버스를 타고 시내관광을 시작하였다. 길거리의 간판에 사용된 문자는 어쩌다 눈에 띄는 한자보다는 로마자(베트남식 알파벳 문자)가 일반적이었는데 이것은 프랑스 식민지배의 영향이라고 한다. 식민지배로 인해 문자가 바뀔 정도인데 여타 사회제도나 의식구조에는 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겠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호치민 시내의 모습은 온통 프랑스 풍이었다. 가끔씩 중국풍(화교)도 보였지만...... 십여년 전에 개봉된 영화 ‘연인’이나 ‘인도차이나’에서 봤던 거리의 모습이 내 눈앞에 펼쳐지니 내가 마치 영화 속으로 뛰어든 느낌도 들었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 양옆으로는 ‘사이콱’(호치민의 옛 이름인 ‘사이공’의 근거가 되는 나무이름)이라는 아주 커다란 나무를 비롯하여 가로수가 많았고 곳곳에 있는 도시공원에는 녹음이 울창한데 이런 것들이 도시내부의 온도를 다소 낮추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특이한 사실은 가로수 아래 부분에 하얀 페인트칠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어두운 밤에 오토바이가 혹시 가로수에 충돌할까봐 예방차원에서 그랬다고 한다.

거리엔 오토바이의 숫자가 단연 압도적이다. 오토바이를 항상 자기의 분신처럼 생각하며 잠을 잘 때에도 옆에 모셔놓을 정도로 개인의 재산1호로 평가된다. 대중교통수단인 버스나 택시가 별로 없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교통정책이라고도 생각되지만 국민들에게는 오토바이가 훨씬 친숙하고 편리한가 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기술이 능숙하다. 모두가 중국제나 일본제라고 하는데 꽤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길가를 질주하는 버스나 승용차를 자세히 보니 간혹 한글이 적힌 중고차량을 발견할 수 가 있었다. 한국에서 운행되었던 학원차나 시내버스를 그대로 수입하여 글자하나 고치지 않고 그냥 사용한다고 한다. 한국사람이 볼 때는 정말 우스운 꼴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의 글자가 외제를 상징하기에 오히려 당당한 표정으로 운전을 한다는 것이다.    

 

 

                              전쟁기념관에서 본 베트남여인들의 전통복장.

 

우리의 처음 견학장소는 전쟁 기념관이었다. 흔히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하면 프랑스와의 전쟁을 1차 전쟁이라고 하고 그 뒤 미국과의 전쟁을 2차 전쟁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2차 전쟁을 특별히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른다. 베트남 민중입장에서 보자면 약 1,000년 간에 걸친 중국의 지배와 약 100년 간에 걸친 프랑스의 지배, 일본의 침략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자유와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엄청난 생명과 재산의 희생이 따르고, 그로 인해 현재 경제적인 낙후를 면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외세를 물리쳤다는 민족적 자긍심은 대단할 것 같다. 베트남 전쟁은 1975년에 끝났으니 올해로 종전 26년째이다. 마침 이곳 전쟁기념관에서는 오늘 개관 17주년 기념식을 하고 있었다. 기념관 내부와 외부에는 당시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나 유물 그리고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고엽제 피해 환자들의 모습이었다. 이 전쟁에 참여했던 우리 한국군의 피해도 문제가 되었지만......  그리고 안내원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 한국군의 활약상은 전쟁의 효율성과 잔혹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증명하였다고 하니 한국인의 한사람으로서 착잡한 심경이 앞서기도 한다. 비록 우리나라가 경제적인 이유로 베트남과 다시 수교하였지만 적어도 그런 과거의 죄악에 대해서 국가차원의 유감 표시와 반성이 이루어져야할 것으로 본다.

전쟁기념관을 나오면서 끈덕지게 달라붙는 거리의 장사꾼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외국인들에게는 물건값을 달러로 흥정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값이 낮아지는 것 같았다.

참고로 이 나라의 경제는 화교들이 주도하고 있다는데 중국인의 타고난 절약과 저축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이곳 원주민인 베트남인들은 열대지방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현재를 즐기는 이른바 현세 지향적 생활방식 때문에 재산을 축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후 시내 중심지에 있는 중앙 대성당(일명 노틀담 성당), 중앙 우체국, 통일궁(과거 대통령궁)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모두 유럽식의 화려하고 고풍스런 건물들이었다. 그런데 그 치열했던 베트남 전쟁에서도 이런 건물들이 파괴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커다란 궁금증을 갖게 하였다. 그래서 역시 안내원을 통해 그 이유를 알아보니 당시 베트남 전쟁의 주요 무대는 베트남 남부의 농촌지역이었고, 당시 수도였던 사이공은 교전 없이 베트콩(베트남 남부의 공산주의자)과 북부 베트남(당시 지도자는 호치민)에 의해 전격적으로 함락되었다고 한다.

 

 

                           호치민시내 중앙대성당앞에서  

 

 

                          베트남 중앙우체국 

 

 

                         대통령궁 

 

베트남의 종교를 알아보면 최대의 종교는 역시 불교이고 그 다음이 카톨릭교(크리스트교)이다. 그래서 시내 곳곳에는 불교사원과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 각기 인도와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이 나라에선 종교의 자유는 있으나 포교의 자유는 없다고 한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통일궁 내부에는 통일 전 남부 베트남의 대통령이 주재하며 정치를 펼쳤던 흔적이 모두 보존되어 있었고 최상층에 올라가 시내를 보니 숲이 우거진 호치민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곳에서는 관광객을 위해 간단한 기념품도 팔고 민속악기를 연주해주기도 하였다. 장엄한 분위기의 통일궁 건물 한 쪽에는 이 나라의 산악지대에 사는 고산족의 가옥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 건물은 잦은 비를 대비하여 지붕의 경사가 심하고 지면의 습기를 피하기 위해 지면과 방바닥 사이에 공간을 두어 짓는, 이른바 고상가옥(우리나라의 원두막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됨)이라고 한다.

 

 

                          고상가옥

 

베트남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나라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열대기후이지만 지역적으로 기온과 강수량이 다르게 나타나고 민족과 주거양식, 생활모습 등 문화의 내용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베트남인들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대체로 자존심이 강하고 권위적인 민족성을 보이며, 자기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질로 인해 변명이 많고 남에게 양보하지 않는 교통문화 등이 나타난다. 중국문화가 베트남인의 의식구조에 영향을 크게 주었다면 생활모습이나 도시구조 등 외형적인 면에서는 프랑스의 영향이 지대한 것 같다. 예를 들자면 방사선 도로를 기본으로 하는 도시계획, 벽체 사이 간격 약4m를 기본으로 하는 상가구조, 아래층에는 상가 위층에는 주거공간 활용, 넓은 테라스를 갖춘 개방형 가옥구조, 거리의 미술관, 카페, 그리고 곳곳의 도시 공원 등등. 물론 중국인들만 모여 사는 차이나타운도 있고 아파트 건물도 있지만 대개는 도로를 따라 2층 내지 3층 형태의 상가와 주거 복합구조 건물이 줄지어서 나타나고 있었다. 농촌지역에서는 외형상 빈부격차를 다소 느낄 수도 있었지만  화려한 건물(조각상과 꽃 화분 장식)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이는 심미안을 추구하는 국민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참고로 건축재료 중 석재는 시멘트 값보다 비싸다고 하는데 이는 이곳 호치민시 일대가 충적지형이기에 돌이 워낙 귀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호치민시의 인구는 공식통계로는 약 300만 명이지만 비공식 통계로는 유동인구를 포함하여 약 1000만 명이라고 한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지만 농촌에서 따나온 부랑자들도 많은 것 같았다. 이 도시는 왼쪽에 메콩강, 오른쪽엔 사이공 강을 끼고 해안 가까이 발달한 그야말로  교통이 편리한 충적 평야상의 도시인데 주변 농촌지역에서 공급되는 풍부한 먹거리와 각종 자원이 이 도시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충적 평야상의 도시라는 증거로 주변에 산이 없고 오르막길이 없기에 이런 곳에서는 자전거를 타기 쉽고 요즘에는 자전거 대신 더욱 편리한 오토바이가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호치민시내 아침풍경. 오토바이의 소음이 아침의 분주함을 느끼게 한다.  

 

베트남은 OPEC(석유수출국 기구)의 회원국으로서 석유 값이 우리의 3분의 1정도인데 아직 정유공장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석유개발에는 한국업체의 참여도 활발하여 조만간 페르시아만 보다 훨씬 가까운 이곳에서 석유를 조달할 수 있다고 한다.

한때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라이 따이한(베트남인과 한국인의 혼혈)문제가 대두되었지만 한국군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보다는 이곳에서 일하는 한국 건설업체의 근로자들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의 숫자가 훨씬 많다고 한다.

이곳 농작물(쌀이나 과일)은 1년에 3번까지도 수확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정부에서는 농산물 값의 안정을 위해 과잉생산을 억제하고 쌀의 경우 2기작까지만 권장하고 있다고 한다. 쌀 농사는 거의 축력(물소)이나 인력으로 이루어지는데 수렁 같은 논(습지)에서 모내기를 하는 모습이 이채로웠고 벼와 잡초가 뒤섞인 곳에 오리를 사육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비료나 농약 대신 유기농의 방법을 사용하는 친환경적 농법이었다. 생산량이 많고 쌀값이 낮기 때문에 비싼 농약이나 비료를 구태여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주요 축산물은 오리, 닭, 돼지라고 한다. 플랜테이션(농장)으로 이루어지는 농업은 커피와 고무나무 농장이 대표적인데 산간지대에서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낮 12시경 우리는 호치민시에서 서남쪽으로 떨어진 교외지역의 도로변 가게에서 잠시 휴식을 하며 열대과일을 먹기도 하였다. 야자류, 파인애플 등을 생으로 먹거나 즙을 내어 먹기도 하였다. 얼음을 타서 먹는 달콤한 과일쥬스가 무더위를 잠시 가시게 만들었다. 허름한 상점이었는데 어린아이가 다가와서 기념엽서나 복권을 팔고자 말 대신 연신 손동작을 하였다. 어차피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세계공통어인 바디 랭귀지(신체언어)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곳 어린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상행위를 통해 자립심을 기르는 것 같기도 하다. 농촌지역에도 도로변에는 노점상이 즐비하였고 길가는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휴게소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또한 군데군데 해먹(그물침대)을 설치하여 손님들이 낮잠을 즐기기도 하였다. 이곳 충적지형의 농촌주택은 홍수에 대비에 흙으로 집터를 높이고 흙을 파낸 웅덩이는 농업 용수용 저수지로 이용한다. 우기에는 비가 자주 오는데 우리나라의 소나기처럼 대류성 강우로서 2~3일 간격으로 내린다고 한다. 장대비처럼 내리는 빗속에서 우산은 효용성이 떨어지고 비옷만 이용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곳 사람들은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냉장고도 들여놓고 있으나 얼음 사용이 주목적이어서 냉장실 기능보다는 냉동실기능만 이용하는 것 같았다. 물수건이나 냉커피, 냉 음료수를 위해 냉동실이 사용될 뿐이었다. 이들은 식사 후 남는 음식을 모조리 버리는 열대기후의 식사습관으로 인해 남은 음식을 냉장실에 보관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 농촌지역은 메콩강 주변의 충적지형으로 끝없이 펼쳐진 평야에 인공운하나 하천 등이 많았는데 유량이 많고 유속이 심하여 강변에는 모래사장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일자로 뻗은 아스팔트 포장도로에 몇 시간을 달려도 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펼쳐진 이런 평야지역은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고 덕분에 가슴까지 후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 비하면 호남평야는 조족지혈인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열대지방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현세적이어서 스포츠, 도박, 아편, 복권 등 향락적인 문화가 발달하였고 간통이나 강간 같은 성범죄가 성립하지 않을 정도로 개방적인 성 풍속을 가지고 있다한다. 성을 사고 파는 매춘행위가 어엿한 직업으로 인정되고 거기에 대해 어느 누구도 비난을 하지 않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부부지간인데도 돈벌이를 위해 부인의 매춘행위를 남편이 돕는 입장이니 우리와는 의식구조가 많이 다른 것 같다.

 

요즘 베트남에서는 한국의 대중문화(대중가요, 드라마, 영화)가 한류(韓流)의 열풍 속에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하는데 마침 시내엔 한국의 연예인 안재욱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나붙어 있기도 하였다. 특히 드라마의 스토리 전개상 비극으로 종결되는 부분에서 한국인과 베트남인의 공통된 정서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오래 전부터 주 5일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출근도 하루에 2번씩(아침, 점심때)한다고 한다. 한낮에는 덥기 때문에 잠시 일을 쉰다고 한다. 열대지방의 기후특성상 이침이나 저녁에 일의 능률이 오르고 사람들의 일상생활도 그 시간에 맞추어 활기를 띠는 것 같았다.

 

베트남 남부지역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국제하천 메콩강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둘로 나뉘고 다시 하류인 베트남에서 9개 지류(구룡강이라 함)로 나뉘어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그 중 호치민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있는 미토(天江)라는 지역은 호치민에서 남서방향으로 약 80Km지점에 위치하는데 우리는 오후 1시경 여기에 도착하였다. 이 지역의 메콩강은 역시 유량이 풍부한 하천으로서 상류에서 내려오는 흙탕물로 인해 온통 황토 빛이었는데 파란 하늘색과 대조를 이루었고 열대지방 특유의 생명력을 느낄 수가  있어 좋았다. 우리는 강변 야외 식당에서 멋진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도 많았다. 주로 이 지방 토속 음식인 것 같은데 강에서 잡은 수산물이 주 재료였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는데 마침 태권도 교류를 위해 이곳에 온 한국체육대학 학생들을 만나기도 하여 무척 반가웠다.

 

 

                           메콩강 하류에서 바라본 수상가옥  

 

 

                          비가 자주 오기때문인지 흙탕물이 되어 흐르는 메콩강.

 

                          메콩강 하류 삼가주를 흐르는 실개천사이로 관광용 소형배들이 통행한다.

 

오후 2시 20분경 가까운 강변 선착장에 도착하여 메콩강을 체험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역시 여자 공무원들은 한결같이 유니폼으로 파란색 아오자이(청나라 군대복장에서 유래한 민속의상으로 긴 옷이라는 뜻)를 입고 있었다. 여객선을 타기 위해 잠시 기다리는 동안 갑자기 한국말로 “땅콩사세요“ 라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이곳 베트남의 어린 소녀 하나가 한국말로 땅콩을 팔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말을 시켜보았지만 역시 ”땅콩사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곳에도 한국인들이 많이 온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유람선을 올라타 본격적으로 메콩강 탐사를 하였다. 주변엔 각종 농산물을 가득 실은 길다란 배들이 지나가고 있었고 집을 겸용하여 타고 다니는 정크선도 볼 수 있었다.

 

오후 3시경 목적지인 도이송 농장(메콩강이 만들어 놓은 윤중도의 하나)에 도착하였다. 우리 일행은 거기에서 재배되는 각종 열대과일을 맘껏 탐닉해보았는데 그 중 파파야는 구린내 비슷한 냄새가 나서 먹는데 역겨웠고, 입맛에 맞는 건 파인애플이었는데 소금을 찍어서 먹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레몬나무도 처음 보게 되었고 이름도 생소한 열대 과일나무가 많았다.

 

농장 한쪽에서는 코코넛 야자를 과자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데 대부분 어린 소녀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 대개 초등학교에서 낙제한 학생들이 일찌감치 이런 직업전선에 투입이 되고 여자들의 경우 번 돈으로 패물을 구입하여 몸치장을 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경제수준은 우리나라의 1970년대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이들은 소득을 저축하기보다는 대부분 살림장만에 과감하게 사용한다고 한다. 학생들도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공부하고 방과후에는 부업을 하여 용돈을 스스로 벌기도 한다.

 

농장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샛강(좁은 자연수로)탐험을 하였는데 길다란 쪽배에 노젓는 뱃사공을 포함하여 4명씩 승선하였다. 에버랜드에 있는 인공수로와는 격이 달랐다. 약 30분 동안 배를 타고 메콩강 주변의 야자수로 우거진 정글(?)지대를 만끽하였다. 돌아오는 여객선에서는 코코넛을 하나씩 받아 빨대를 꽂아 배가 터지도록 즙을 마셨다. 

 

다시 호치민시로 향하는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안내원의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 이곳은 도시 주변의 농촌지역인데도 거의 모든 집들이 도로를 따라 입지하고 있었는데, 어차피 산이나 구릉이 없기 때문에 우리처럼 배산임수형의 집촌이 형성될 수 없고 기능성이 가장 높은 가촌만이 형성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 쌀 농사 지역답게 인구밀도가 무척 높다는 것도 실감할 수 있었다. 

 

베트남인들이 오랫동안 역사적 시련을 겪었다는 점은 우리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크게 다른 점 중의 하나는 민족의 동질성을 강하게 추구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다민족 국가로서 조화를 추구하고 외래문화를 흡수하는 데에도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고 흡수력도 강하여 특별히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점이 요즘 같은 국제화시대엔 강점으로 작용할 지도 모르겠다. 

이곳 메콩 델타지역에는 야자수가 많은데 나무가 잘 썩지 않아 선재나 건축재로 사용된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된 고목은 별로 없고 20 ~30년 내외의 야자수만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사용한 고엽제의 영향이라고 한다.

흔히 이곳 남부 베트남을 하늘의 축복을 받은 천혜의 땅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먹거리가 풍부하게 생산되고, 추위가 없고, 지진이나 태풍 같은 자연재해가 없다는 점이 큰 이유일 것 같다.

늦은 오후, 호치민 시내를 향하는 국도엔 엄청난 인파가 제각기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하여 시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중엔 역시 예쁜 아가씨들의 모습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모두들 날씬한 체형인데 자전거나 오토바이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앞만 보고 달리는 모습이 이방인의 눈을 사로잡을 정도로 멋있게 보였다. 그 중엔 화장을 진하게 하고 하얀색의 아오자이를 입고 어디론가 바삐 가는 젊은 여자들도 보였는데 안내원의 설명으로는 대개 유흥업소에 출근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여자들은 얼굴 화장을 낮엔 땀 때문에 하지 않고 밤에만 한다고 한다.

저녁식사는 한국음식점(가야관)에 가서 먹었는데 외국에서 먹게되는 한국음식은 역시 최고의 맛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어제 갔던 호텔로 갔다. 룸메이트인 박경우 선생님과 함께 특별한 추억거리를 만들기 위해 시클로(운전자가 뒤에서 페달을 밟고 손님은 앞에 타는 자전거형 인력거)를 이용한 시내구경을 하였다. 1대에 1사람씩 타는데 2시간 운행에 9달러와 팁 1달러를 추가로 지불하였다. 호치민 시내의 야경은 휘황찬란하였고 도로를 오가는 차량의 소음과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로 인해 밤이 낮보다 훨씬 활기차 보였다. “낮에는 호치민, 밤에는 사이공”(이 도시는 밤에 제 모습을 찾는 다는 뜻)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시클로 여행은 가까이에서 들리는 오토바이의 소음도 문제지만 내뿜는 배기가스로 인해 눈이 매울 정도였고 무질서한 차량운행 때문에 혹시나 부딪힐까봐 겁이 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위태로울 정도로 무질서한 교통상황이지만 의외로 사고는 적다고 하는데 이는 무질서 속에 질서가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운전자와 보행자들이 자기 앞만 보고 달려가는데도  접촉사고 없이 교차로나 횡단보도에서 물 흐르듯 자기 길을 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가히 예술의 경지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교통법규란 애초부터 서로 무시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인지  누군가 자기 앞을 방해하는 경우가 발생해도 짜증이나 화를 별로 내지 않는 것 같다. 

거리에는 품격이 다양한 카페가 많았는데 시내 중심지일수록 화려한 카페(술도 마시고 가무를 즐기는 곳)가 많았고, 변두리 주택가엔 서민들을 위한 허름한 노상 카페가 많았다. 이들의 음주문화는 우리처럼 급한 속도로 취하도록 마시는 게 아니고 술 한 두잔을 마시며 몇시간 동안 담소를 즐긴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밤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이 많았는데 열대지방은 밤에도 더운 날씨이기 때문에 집안에 있기보다는 이런 곳에 나와서 친구나 이웃들과 담소를 즐기는 것 같았다. 젊은이들은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연인들과 함께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이곳의 사회 분위기는 대단히 향락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흥청망청 놀면서 인생을 즐기는 것 같고 우리나라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일 것 같다.

 


 

7월 21일

여행 셋째 날, 아침 8시 40분경 호텔을 출발하여 관광을 시작하였다. 오늘의 일정은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구치 터널을 찾아가는 일이다. 구치라는 지역은 호치민시에서 서북쪽으로 약 50Km, 차량으로는 도로상태가 좋지 못해 약 1시간 20분 정도가 걸렸다.

우리가 가는 길에서는 마침 도로 확. 포장 공사가 한참이었는데 바로 호치민에서 프놈펜, 방콕을 거쳐 싱가포르까지 이어지는 Asian Highway의 공사장면이라고 한다. 이 도로가 완성되면 동남아시아 국가들간의 인적. 물적 교류와 협력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호치민시를 벗어나니 전형적인 베트남의 농촌모습이 전개되었다. 논에서는 야자수 잎으로 만든 원뿔 모양의 모자를 쓴 아낙네들이 모내기를 하고 물소가 쟁기질하는 모습이 그저 평화스럽게만 보였다. 구릉지에서는 고무나무나 후추나무 등을 대규모로 재배하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곳 구치 지역은 과거 베트남 전쟁 때 가장 치열했던 전투지역이다. 이곳은 흔히 베트콩이라 불리는 인민해방전선의 근거지였고 남부 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당시 정부군과 미군)을 공격하기 위한 전진기지였던 곳이다.

우리는 오전 10시경 구치(Cu chi)에 도착하여 베트남 전쟁 때 이곳 주민들(베트콩)이 미군과 치열하게 싸웠던 장면들을 담아 놓은 간단한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과거 람보 같은 미국 편향적인 영화만 보다가 베트남 민중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보게 되니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알다시피 강대국 미국에 비해 턱없이 열악한 조건을 가진 인민해방전선(베트콩)세력은 많은 인적, 물적 희생에도 불구하고 끝내 승리를 쟁취하게 된 것은 누가 보아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외세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베트남 민중들의 저항 정신 그리고 고향을 지키고자 했던 소박한 애향심 등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에게 치욕스런 패배를 안긴 건 바로 베트남인 것이다.

 

 

                           베트남전쟁때 사용했다고 하는 작은 터널 입구.

 

                            베트콩 전사들의 복장을 한 마네킹과 기념사진을....

 

우리는 이어서 이 지역의 관광명소인 구치터널을 견학하였다. 주변 경관은 구릉성 산지이고토양은 단단한 충적토로 구성되어 터널을 조성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지층 구조상 불투수층이 있어 빗물이 잘 흡수되지 않아 터널이 쉽게 붕괴되지 않는다고 한다. 굴의 직경은 약 50~70 ㎝정도로서 베트남인들의 작은 체형에 맞는 크기였다. 특별히 관광객들에게 개방된 일부터널들은 나중에 더 확장한 형태라고 하고 백열전구도 곳곳에 설치하였다. 우리는 십여미터의 짧은 터널체험인데도 불구하고 그 속에 들어가서는 네발(?)로 기어가니 답답하기도 하고 땀도 많이 나서 모두들 힘들어하였다. 이런 터널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와의 전쟁 때부터이고 마을 단위로 조성하였기 때문에 그 지역 사람들만 그 구조를 알 수 있고 전체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지 않아 게릴라 전술을 수행하기에 적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까지 발견된 터널의 총 길이는 250Km이고 여러 층으로 설계되었으며 15m이하에 지하수 층이 있어 자체적으로 용수공급도 가능하다고 한다. 전시에는 밖에 나오지 않고도 취사에서부터 잠까지 모든 일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하니 가히 예술의 경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어마어마한 지하 터널을 만든 방법도 원시적 도구인 호미와 삼태기라고 하니 그들의 열정에 탄복할 만도 하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사냥도구로 사용하였던 다양한 덫을 활용하여 미군과의 전쟁을 수행하였고 이런 원시적인 도구들이 미군들에게는 커다란 심리적 공포로 작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지하터널을 근거지로 싸우는 베트콩에게 미군이 사용한 고엽제(제초제의 일종으로 모든 식물을 고사시킴)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모든 터널의 입구는 교묘하게 위장이 되었고 설령 발견이 된다 할지라도 미군들은 몸집이 커서 들어갈 수 없는 구조였고, 사람대신 군용견을 집어넣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개는 베트콩들에게 단백질 공급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사이공에서 비교적 가까운 이곳 구치 지역이 베트콩들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은 공격목표인 사이공이 가깝고 지하터널에 요새를 만들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캄보디아 국경이 가까워 호치민이 이끄는 북부 베트남 정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등이 지정학적으로 고려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터널 체험을 마치고 숲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자스민 차와 타피오카(고구마의 일종)를 먹기도 하였다. 그리고 베트콩 전사의 모습을 갖춘 마네킹 앞에서 기념촬영도 하였다. 주변 기념품 가게에서는 다양한 기념품을 판매하였는데 그 중에서 구치 터널과 관련된 전쟁모습을 찍은 사진첩을 구입하였다.

11시 40분경 호치민시로 가기 위해 관광버스에 올랐는데 마침 소나기성 강우(스콜)를 만났다. 엄청난 장대비속을 뚫고 차가 달리는데 금방 도로에 물이 넘쳐나고 길을 지나는 보행자나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모두 비옷을 입고 있었다. 사회교과서에 나오는 스콜이라 불리는 열대지방의 대류성 강우현상을 내 눈으로 확인하게 되니 감격 그 자체였다. 나의 이런 느낌과는 달리 이번 여행을 통해 나와 다른 전공 과목의 선생님들은 또 다른 시각에서 배우고 느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견학이란 그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고 자기의 기존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또 다른 해석 작업인 것 같다.

차안에서 우리는 안내원이 들려주는 베트남의 역사를 듣게 되었는데 한마디로 베트남의 역사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처럼 외세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았던 역사였고 또한 그런 시련을 꿋꿋이 극복한 자랑스런 역사이기도 하다.

오후 1시경 호치민시에 있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아리랑 가든)에 들러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당주인은 한국에서 온 아주머니이고 종업원은 현지인 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오후 2시경 점심을 마치고 다음 숙소인 동해안의 휴양도시 판티엣을 향해 동쪽으로 향하였다. 호치민시의 북쪽지역을 통과하는데 카톨릭 성당이 밀집된 지역을 통과하였다. 성당의 모습은 제각기 달랐고 개성 있고 화려한 건축물이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예수님이나 성모마리아 상을 장식해놓은 것으로 보아 카톨릭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인 것 같았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베트남은 주택의 기본구조가 비슷하였다. 지붕이나 테라스 같은 외형적인 장식만 다를 뿐이고, 도로를 향해 세운 벽체의 간격이 4m이고 그 뒤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의 평면도를 갖는 2~3층 구조라는 점이다. 이런 기본 구조는 과거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면서 획일적으로 보급한 주택구조라고 한다. 특히 벽체의 주재료는 빨간 흙벽돌인데 속이 빈 블록 식의 벽돌이었다. 이런 벽돌 구조는 방음이 잘 안되고 벽체가 약하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통기성이 강하여 열대기후를 극복할 수 있고 자연재해가 없기 때문에 건물이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지붕은 거의 단순한 맞배지붕 구조였다.  

베트남도 역시 우리나라처럼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맥이 동해안에 치우쳐 발달하기 때문에 동해안쪽이 급사면이라고 보아진다. 호치민시 주변에서는 산을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평탄한 충적지형만 보다가 동해안이 가까워지자 조금씩 높아지는 구릉성 산지를 볼 수가 있었다. 도로는 거의 직선형으로 뚫려있고 야자수 등 열대수목이 펼쳐진 경관은 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다. 식민지 시대에 조성된 고무나무나 커피 농장도 군데군데 펼쳐진다.

중간에 우리는 휴게소에 들렀는데 식당과 화장실을 갖춘 곳이었다. 시골 아낙네들이 바구니에 열대과일을 잔뜩 가지고 와서 관광객을 상대로 판매를 하고 있었고 우리 안내원이 몇 가지 과일을 구입하였다. 처음 먹어보는 과일들이었는데, 용의 과일이라 불리는 선인장과의 타인롱, 성게와 비슷한 랑브탕(쩜쩜), 냄새가 역겨운 두리안, 용의 눈알인 용안(냔) 등이 인상적이었다. 열대과일은 대체로 껍질이 두껍고 그 안에 즙이 많았다. 그리고 쉽게 상하기 때문에 보관하거나 수출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베트남은 1980년대 말 이른바 신 경제 정책(도이모이)을 통해  사유재산을 인정하였다. 생산성 제고를 위해서 사회주의 국가의 근간을 포기한 것이다. 통일 후 국가적 시너지 효과도 있었지만 문제점도 많이 노출되었다. 베트남 경제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남부의 호치민시는 그에 걸 맞는 자치권이 없고 대신 북부 하노이에서 파견되는 공산당원과 관료들이 요직을 차지하는 바람에 정치적인 불만이 생긴다고도 한다. 200만 명에 이르는 공산당원들로 인해 새로운 지식을 갖춘 젊은 엘리트들의 사회적 신분상승이 어려워 이것 또한 문제라고 한다.

오후 6시 30분경 목적지 판티엣 주변의 휴양지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원래 멸치액젓으로 유명한 어항이었는데 주변에 풍광이 좋은 백사장을 이용한 휴양시설을 갖추어 관광 휴양도시로도 발전하고 있다 한다. 모래사장에 꽉 들어찬 야자수와 시원한 바닷바람이 남국의 정취를 한껏 전해 준다.  이곳의 모래는 입자크기가 미세한 모래로서 바다의 강한 파도와 바람에 의해 운반되기 때문인지 해안 산맥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사구도 볼 수 있었다. 사구로 변한 모래의 경우 황토 흙과 비슷한 붉은 색을 띠는 데 이는 산화작용에 의한 변화라고 여겨진다.

저녁 7시경 우리는 숙소인 Saigon Muine Resort (별 3개의 호텔)에 짐을 풀었다. 영화에서나 보았던 방갈로형 호텔이었는데 쾌적한 휴양을 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었다.

숙소 외에 노래방, 테니스장, 야외수영장 등 부대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는 저녁 화려한 만찬을 위해 가까운 바닷가 식당을 찾아갔다. 평소 먹어보지 못한 다양한 해산물을 먹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바다가재(일명 닭새우)를 저렴한 가격으로 맛볼 수 있어 좋았다.

 

 

                                  판티엣 해변가

 

 

                                  공예품

                                 해변가 관광객을 위한 휴양시설

 

 

 


 

7월 22일

여행 넷째 날, 우리는 이곳 판티엣 숙소에서 12시까지 머무르기로 하였다. 아침 식사는 쌀 국수와 과일즙으로 골라 먹었다. 베트남의 음식은 대체로 향신료나 향채를 부재료로 많이 쓰기 때문에 우리네 식성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식사 후 우리는 바닷가에 나가 수영을 마음껏 즐기기도 하였다. 여기는 주로 외국인과 신분이 높은 내국인 또는 돈 많은 재외 베트남인들이 찾는다고 한다. 통일 직후, 과거 남부 베트남 정권에 협조했던 사람들이 징계가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 사유재산을 빼앗길까봐 조국을 등지고 배를 타고 무작정 탈출(보트 피플)했었는데 요즘 베트남정부가 해외자본을 끌어들이려는 유화정책을 실시함 따라 그런 사람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베트남 정부의 실용주의 노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우리는 흔히 베트남이 통일직후 엄청난 징계와 숙청작업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실제로는 극소수에게만 형벌이 내려졌었고 대부분 과거를 반성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새로운 사상을 심어주기 위한 재교육만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국민화합을 위해 과거를 쉽게 용서해 주는 아량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될 지는 모르겠다.

낮 12시 30분경 호텔을 출발하여 가까운 바닷가 식당을 찾아 점심식사를 하였다. 역시 이곳의 토속 음식인데 우리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더운 날씨 탓에 시원한 맥주를 먹어보았다. 모든 음료는 얼음을 타서 먹는데 역시 맥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맥주 컵에 얼음을 넣으면 알코올이 희석되어 맛은 떨어지지만 속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오후 2시 20분경 식사를 마치고 남은 일정을 재촉하였다.

해안도로를 따라 휴양시설이 줄지어 있었고 멋진 호텔들도 많았다. 우리는 바닷가의 높은 산에 올랐는데 동쪽으로는 동해의 수평선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가까운 판티엣이라는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곳에 남부 베트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역사적인 유적지가 있었다. 이곳을 탑참(참족의 탑)이라고 부르는데 몇 개의 전탑(벽돌로 만든 탑)이 부분적으로 부서진 채 서있었다. 주변에서 가장 높은 지형을 골라 신앙의 대상으로 세운 것 같았다. 탑 안으로 사람이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신기하게도 남근석을 상징하는 석상이 있었다. 이 탑은 힌두교와 불교가 뒤섞인 중국의 당나라시대 즉 7~8세기의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한다. 남부 베트남에는 역사서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유물의 조성시기를 짐작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만큼 이 지역은 주변나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고 민족의 흥망성쇠가 빈번하였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벽돌로 만든 전탑 유적

 

 

 

                             '타피오카' 라고 하는 고구마 비슷한 작물.

                          결혼식을 올린 신랑신부의 모습.

 

                           길거리에서 우연히 오토바이 교통사고 장면을 목격하였다.

 

                           순박한 모습의 베트남 아이들의 모습

 

                            풀벌레 모습으로 만든 공예품.

 

우리가 보통 베트남이라고 하면 과거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북쪽만을 의미했고, 남쪽엔 전혀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다른 민족이 살았다고 한다. 실제로 북쪽의 대월국이 남부지역을 하나의 나라로 합친 것은 1698년의 사실이라고 한다.  특히 남쪽은 주변 크메르(캄보디아)의 영향을 많이 받아 힌두교를 비롯한 인도문화가 주류를 형성했던 것이다. 한편 힌두교에선 건축물을 지을 때 신에 대한 경배대상으로는 석재를 사용하고, 인간이 사용하는 건물의 경우에는 목조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조상들이 거주했던 오래된 건축물은 오래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석재나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유적지(절이나 탑 등 신앙의 대상)가 남부에는 별로 남아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평탄한 지형과 바다를 끼고 있는 개방적인 지역으로 외침의 역사가 많다보니 침략자들에 의한 유물. 유적의 파괴가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저녁 7시 20분경 호치민시에 도착하였다. 호치민시의 중심지인 시민극장 앞 광장에는 호치민의 동상이 있었고 주변 건물들은 역사가 오래된 프랑스 풍의 옛 건물이 많았는데 아름다운 조명 빛에 휘황찬란한 모습이었다. 이곳은 밤이 되자 더욱 넘쳐나는 인파로 인해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호치민시는 식민시대에 방사선 또는 직선 상으로 조성된 계획도로가 많아 길을 찾기도 편하다. 우리는 동남쪽 사이공강 쪽으로 뻗은 동커이 거리를 걸으며 시내 구경과 쇼핑을 즐겼다.

저녁 8시 20분경, 우리는 사이공 강을 운행하는 유람선에 올라 디너쇼를 보며 저녁식사를 하였다. 화려한 선상의 조명과 함께 색다른 음식들을 맛보았는데 역시 음식은 입맛에 맞질 않았고 대신 이곳 가수들의 노래를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현지 가수들이 부르는 베트남의 대중가요는 중국풍의 노래였고 가끔씩 한국의 대중가요를 불러주니 고맙고 즐거운 마음이었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이곳 베트남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발음도 정확하지 않지만 ‘소양강 처녀’나 ‘만남’ 등을 부르는 모습이 약간 우습기도 하였다. 관객들 중에는 가수의 노래가 끝날 때마다 물컵 아래에 돈을 끼워서 주곤 하였는데 이건 팁이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나라에 팁 문화가 확산된 건 역시 식민지 시대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약 1시간 30분간의 유람선 승선을 마치고 약 1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을 가진 다음 출국을 위해 공항으로 향하였다. 지금껏 열심히 안내를 해준 현지 안내원은 결론적으로 베트남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이 나라는 비록 어둡고 부정적인 면도 많지만 가급적 밝고 긍정적인 면을 기억해주고, 사회적 문제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나라로서 희망이 많은 나라라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이 향락적인 것 같아도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엘리트들의 정신만큼은 건전하다는 등등의 얘기를 하면서 이번 여행의 길라잡이 역할을 마치게 되었다.

밤 1시경 한국으로 향하는 아시아나 항공의 비행기가 호치민시의 황홀한 도시야경을 뒤로하며 밤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비록 짧은 여정이었지만 베트남인들의 순박한 미소가 머릿속을 스쳐간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한국시간으로 8시경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