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정읍이야기

“그전엔 요쪽으로 기차가 지나갔는디”

뿌리기픈 2007. 12. 10. 22:14

“그전엔 요쪽으로 기차가 지나갔는디”

노령역과 그 주변의 옛 철길을 찾아서

 

박래철 ppuri1@eduhope.net

 

 

 

 

 
▲ 옛철로에서 바라본 노령역. 아래쪽에 있으며 뒷쪽에는 입암저수지가 보인다.


기차를 타고 달리면서 맛보는 일상 탈출의 여유로움도 멋진 낭만이지만, 어느 한적한 시골 역 플래트폼에 서서 철길이 보여주는 소실점을 감상하는 것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대전-목포 간 호남선 철도는 정읍시 구간에 6개의 정차 역을 두고 있고, 그 중심은 정읍역이다.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한 정읍역은 시외버스터미널과 함께 정읍의 관문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이곳 연지동에는 나라의 공식적 교통통신시설인 연지원(영지원)이라는 공무수행를 위한 숙박시설이 있었던 곳이었고, 이후 일제강점기 호남선 개통으로 정읍역이 생겼으니, 결과적으로 ‘역’(驛)과 ‘원’(院)이라는 용어를 합하여 ‘역원취락’이라 불러주는 것이 제격인 것 같다.  이제는 ‘춤추는 음악분수’가 유혹하는 역전광장과,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번득이는 러브호텔이 1세기전의 풍경을 크게 바꾸어 놓긴 했지만...

이런 첨단의 풍경을 갖는 도시의 기차역과는 대조적으로 시골 역은 아직도 풋풋하고 소박한 낭만을 지니고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최근 이런 맥락과 관련하여 전국적으로 오래된 시골 역사(驛舍) 몇 군데를 문화유산으로 정한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모든 게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대형화되는 세상에서, 낡고 작은 것들에게 대한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럼 정읍역의 아래쪽 하행선에 해당하는 노령역과 그 주변 옛 철길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자동차길이 된 옛 철길을 따라서

 정읍시내에서 단고개를 넘고 과교동을 지나 진산동쪽으로 진행하다보면 어느새 오른편에 호남선 철도를 바짝 끼고 길을 달리게 된다. 철도가 복선화되고 전철화 되어 옛 정취는 아니지만 그래도 느낌이 좋다. 달리는 기차라도 만나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본능이 느껴진다. 어쩌면 기차에게 탈선은 금물이지만, 인간에게 일탈은 삶의 활력이 될 수 있기에 가끔은 용납될 수 있을 것이다. 길을 달려 입암면 접지리에 있는 천원역을 막 지나서 송정마을 앞에서부터는 도로와 가까이 평행으로 달리던 기찻길이 멀어지게 된다. 바로 여기부터가 과거에는 기차가 달렸지만, 이후 철도 이설로 지금은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길이다. 정확히 말해 이설된 옛 철길은 입암면 접지리 송정마을에서 시작하여 신면리, 하부리, 등천리를 지나고 노령산맥을 터널로 통과하여, 전남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신목란 마을까지 이른다. 현재 옛 철로 중 송정마을에서부터 등천리 원등마을까지는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있고, 나머지 구간은 터널이 지나가므로 자동차의 통행이 제한되어 있는 상태이

다.

‘작은굴’(약 400m)의 군령마을 쪽 입구에서 시작하여 ‘노령터널’(약 1,000m) 입구까지는 철로(鐵路)와 침목(枕木)만 제거되었을 뿐 기찻길의 흔적이 그대로이다. 옛 기찻길을 따라 깔려있는 하얀색의 ‘깬 자갈’(쇄석)이 기차의 궤적을 그려주고 있고 2개의 터널, 굴다리, 절개지, 그리고 주변의 호젓한 풍경 등이 그때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개발의 손길이 아직은 미치지 못한 그야말로 정읍의 비경(秘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행여나 이런 곳이 이렇게 공개되어 찾는 이들이 많아지고, 그로인해 풍경이 망가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앞선다. 아직은 입암면에 사는 분들이 여름 피서를 위해 군령마을 앞의 굴다리 아래와 노령터널 입구의 숲길을 찾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 입암면 등천리 원등마을에 있는 옛 노령역 터. 지금은 일반주택이 들어서있지만 왼쪽이 노령역 터이고 가운데 절개지로 기차가 통과했을 것이다.


 

 

 

 
▲ 걸어서 행복해지는 아름다운 길. 지금은 한쪽에 가스관이 묻혀있는 곳인데 가스공사측에서 노령산맥을 통과하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이곳 옛 철로와 터널을 이용한 것 같다.


옛 터널을 문화공간으로 만든다면...

철로 이설 이후 레일은 철거되고, 기존의 ‘작은 굴’과 ‘노령 터널’ 대신 새로운 ‘노령 제1호 터널’과 ‘노령 제2호 터널’이 만들어졌다. 만일 이곳의 레일과 침목이 철거하지 않았다면 강원도 정선처럼  레일 바이크(레일위에 설치된 자전거 같은 시설)를 설치하여 관광객을 끌어 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터널은 여름에 영화상영이나 작품전시 등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참으로 애석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국영공사와 지자체의 협조체제가 더욱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한편 철도공사 측에서는 이미 철로와 터널 부지를 매각하였고, 이 중 터널은 개인이 한때 젓갈보관 장소로 사용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1994년 이후 한국가스공사 측이 임차하여 지하에 가스관을 매설하였고, 이에 따라 외부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이다. 참고로 이곳은 전국적인 천연가스(LNG, 일명 도시가스) 네트워크 중 평택 항에서부터 시작하여 충남, 전북, 전남지역으로 이어지는 배선이 노령산맥을 통과하는 중요한 지역인 것이다.

 

 

 

 
▲ 군령마을 사람들이 산쪽으로 농사지으러 갈때 통과하는 굴다리.
폭이 상당히 넓은데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노령역에서도 하루 2번은 열차가 선다

그렇다면 당시 입암면 지역에서 철로변경은 왜 그리고 언제 이루어졌는가?  일제 강점기 호남선(대전-목포간) 철도 공사는 1911년에 시작하여 1914년까지 단선으로 완공되었다. 정읍 구간의 경우 1912년에 정읍 역사(驛舍)가 완공되어 영업을 시작하면서, 신태인역(1914년), 천원역(1945년), 노령역(1968), 초강역(?), 감곡역(?), 등 총 6개 역이 만들어졌다. 이후 경제성장에 따라 증가하는 인적, 물적 교통량을 소화하기 위해 복선화 공사를 1968년에 시작하여 1988년에 마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령산맥을 통과하는 정읍 구간의 경우, 경사도와 굴곡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존 철로보다 고도를 낮추어 그 아래쪽에 새로운 철로(약 9km)를 직선상으로 개설하였고, 동시에 노령역도 1987년에 완공되어 옮겨진 것이다. 구 노령역 터는 등천리 원등마을에 있는데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 있었고 주변 절개지 외에는 전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현재 노령역은 주변 입암산 자락의 채석장에서 만들어진 쇄석을 공급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고, 하루 상하행선 한 차례씩 모두 2번 여객을 위해 정차를 하는데 비록 몇 명이지만 인근의 입암산을 찾는 등산객들을 배려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인근 천원역의 경우 하루 상하행선 2번씩 모두 4번 정차를 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촌향도 현상에 따라 이용객은 크게 줄어들어 급기야 1991년에는 이곳 노령역도 원격제어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인건비를 줄이는 목적인

것 같다.

평소 아무도 없는 노령 역에 혼자 들러보니 기분이 참 묘해진다. 마치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유령 역처럼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고 할까? 복선화되고 전철화 되고 거기다 역사까지 현대화된 건물이다 보니 시골 간이역만이 갖는 낭만적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간간이 무심코 지나가는 기차가 그저 매정하게 느껴질 뿐이다.

 

 

 

 
▲ 노령역은 천원역과 백양사역 사이에 있는 조용한 역이다.


고속철도 정차역 설치의 대차대조표는?

이제 호남선 철도가 20세기 초에 시작되어 지금의 21세기 초반까지 약 100여년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  이 즈음, 앞으로 노령역을 포함한 호남선 철도에는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앞으로 호남지방에 고속전철의 전용선이 신설되고 정읍역이 정차역으로 이용될 때 정읍에서도 철도교통의 비중은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과연 정읍역의 역세권 확장이 전북 서남권의 거점도시로서 정읍의 인구를 늘리고 정읍을 중흥(中興)시킬 것인가? 아니면 정읍을 종횡으로 달릴 수 있도록 신설되고 확장되는 도로교통이 여전히 우세하여, 정읍의 인구가 정체되고 정읍은 그저 잠시 머무르거나 지나가는 정거장으로만 이용될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고속전철 정읍역이 갖게 될 흡입력과 날로 편리해지는 도로교통으로 인해 예상되는 인구의 전출 가능성 간에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보아야할 시점이다. 말하자면 철도교통의 구심력과 도로교통의 원심력사이에  팽팽한 접전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입력 : 2006년 10월 07일 20:50:03 / 수정 : 2007년 02월 18일 08:12:41